기억나지 않는 어린시절부터 아빠가 싫었다. 언제부터라고 묻는다면 아마 "태어난 순간부터"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집이 잘 살았을 때도, 집이 못 살았을 때도
아빠가 돈을 많이 벌어와 내가 하고 싶을걸 다 하게 해줬을 때도, 지지리 돈을 못 벌어와 빚쟁이들에게 쫓길때도.
나는 공평하게 아빠가 싫었다. 그 공평함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다.
아빠는 어린시절부터 쓸데없는 헛소리만 했고, 나와 오빠에게 말도 안되는 높은 목표를 제시했다. 술만 마시면 우리를 쇼파에 앉혀놓고 자신의 위대한 삶의 서사를 읊조리길 좋아했다. 나는 그 시간이 고문과도 같았는데,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아빠는 몹시 화를 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헛소리들을 들어줘야 했다.
아빠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좋아하고 존경했으며, 본인도 군인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오빠가 유치원생이 되기도 전부터
"너는 사관학교를 가야한다."
라는 강요를 했었고, 나에게는
"우리 딸은 경찰대학을 가야한다. 그래서 경찰총장이 되야 한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이 진절머리나게 싫었다. 그 말을 들을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아빠는 자식들에게 어처구니 없는 강요를 하며 종종 군대를 가지 않은 남자들을 조롱했다. 군대를 나오지 않은 남자들은 이 세상에서 쓸모가 없는 쓰레기들이라는 둥, 군대를 가야 인간이 되는데 안 갔다 온 것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둥. 나는 어느날 작은 아빠와 술을 먹을 기회가 생겼고
"느그 아빠는 군대갔다가 9개월만에 제대했다 아니가"
"왜요?"
"몰라. 그때 다쳤다나. 너무 오래되서 기억이 안나노. 뭐 할튼 9개월만에 제대했다. 그래서 이등병인가 상병인가에 제대했을끼다."
라는 비밀을 말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군대에 집착하는 아빠가 더더욱 하찮게 느껴졌다.
아빠는 자식들을 배려하고 존중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대로 잘해주고, 그걸 받아주지 않으면 또다시 역정을 냈다. 관심이라곤 없으면서 성과만 중시했고, 나의 기분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아빠는 일년에 백번은 내 나이를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이 정말 싫었다. 아빠에게 나이가 몇살이냐는 질문을 받을때마다 모욕감을 느끼며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하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몇살인지도 모르는 딸의 성적표 숫자에는 예민했다. 지난달에 내가 몇등이었는지, 작년에는 내가 몇등인지를 줄줄줄 외우고 있었다. 그러다 등수가 조금 떨어진다 싶으면 아빠 친구 아들 딸들의 성적을 나열하며 내가 너에게 들인 돈이 얼만데 이것밖에 못해오냐는 식의 말을 했다.
집이 망하고 좋았던 것은 더이상 그 따위 말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이고
아빠가 빚쟁이에게 쫓겨다니며 더이상 내 성적따윈 관심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빠는 퇴근길에 항상 단팥빵을 사왔다. 나는 인생의 단 한순간도 팥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아빠는 항상 나에게 단팥빵을 건네며
"우리 딸이 제일 좋아하는 걸 사왔다."
라고 했다. 단팥빵은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빵이었다. 간혹 내가 그 빵을 먹지 않으면 아빠를 무시한다며 화를 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싫어하는 단팥빵을 꾸역꾸역 먹곤 했다. 아빠에 관한 기억들은 온통 이런것들 뿐이다.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퇴근길, 남편에게 전화하는 시간이다. 급한 회의가 아니라면 남편은 내 전화를 꼬박꼬박 받아준다.
- 오늘 힘든일은 없었어?
- 점심은 맛있는걸 먹었어?
- 주말에 뭐하고 뭘 먹지?
일상의 사소한 것을 물어봐주는데, 나는 이 시간이 참 좋다. 문득 남편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이나 아들의 전화도 다정하게 받아주는 아빠가 될 것 같았다.
"나도 다정한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어."
"왜? 또 장인어른이 뭐라구 했어?"
"아니. 그냥. 오빠같은 다정한 아빠가 있었다면 나도 좀 덜 모가 나지 않았을까해서."
난 여전히 세상을 격투기장으로 본다. 그 싸움판에서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싸움닭같다. 물어뜯고 피를 흘려야만 그제서야 되려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나도 남편처럼 따뜻한 아빠가 있었다면 세상을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살지 않았을까.
그러고보니 남편을 만나고 난 후부턴 좀 편해졌다. 마음이든 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