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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빙스톤 Mar 04. 2023

[실크로드] 내가 이모와 여행하는 이







나의 이모는 함께 여행을 하기에 괜찮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근데 나도 그렇다. 난 내가 함께 여행하기에는 너무 예민하고, 까칠해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첫번째 배낭여행 이후다.) 그냥 혼자 다닌다.


엄마와의 배낭여행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난 단지 엄마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갑질'할 상대이기 때문에 같이 다니는 거다. 박귀미씨는 딸인 내가 외국에서 또라이 짓을 해도 허허허 웃고만 있는 것을 보면 천사임이 분명하다.  

(에피소드야 많다. 기차역에서 표산거, 인도 기차에서 멱살잡고 싸운거, 릭샤꾼이랑 바닥에 뒹굴면서 싸운거....)


근데 이모는 내가 갑질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또한 외국에서 내가 또라이짓을 하면 등뒤에서 싸대기를 날리며 나를 가장 먼저 욕하는 사람이다. 가끔 그 말들은 '인격살인'인지 아닌지의 경계에 서 있는 말들이다.


여기서 이모 욕하는게 무척 미안하지만, 털어 놓은 김에 몇 가지 더 털어놓고싶다.


이모는 고집이 쎄다. 그래서 식당에서 메뉴를 정할때는 각자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없다. 3가지 메뉴 모두 이모가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한다.


이모는 화를 자주 낸다. 여행을 나오면 밖에서는 대부분 화가 나 있다. 내가 예약한 숙소가 이상해도 화를 내고, 미지근한 콜라를 사도 화를 낸다. 날이 덥거나 조금이라도 걷는 날에는 화가 폭발한다.


이모는 남의 말을 안 듣는다. 내가 중국에 대해 많이 알진 못해도, 여행에 대해선 이모보단 많이 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도 내 말은 다 틀렸단다. 예를 들면 내가 중국 기차표를 인터넷으로 예매했다고 해도, 그렇게 했을리가 없단다. 2개월전부터 씨트립 열리는 시간 기다려 광클릭으로 구매를 했다고 해도, 기차표 사는 일이 그렇게 힘든일이 아닐꺼란다. 서울역이나 부산역에 가서 KTX표 달라고 하면 주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중국 기차표 사본 사람들. 댓글 좀 달아봐요. 기차표 사는게 얼마나 힘들고 번거로운 일인지.

그것도 원하는 날짜에 원하는 좌석을 끊는게 얼마나 힘든일인지!!!!)


오늘 밤새도록 여행지에서 이모의 만행을 쓰라고 하면 한편의 논문으로라도 작성해서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럼. 

그런 이모와 왜 여행을 하느냐고.

그렇게 짜증나고 힘들며, 돌아와서까지 욕할꺼면 같이 안 가면 되지 않느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모가 좋다. 내가 기억하는 내 어린시절의 이모는 지금처럼 고집쎄고, 까칠하며, 항상 화가 나 있는 노처녀는 아니었다. 아니, 그 반대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이모의 별명은 '방실이'였다. 항상 방실방실 웃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20대부터 30대초반까지, 이모는 부산의료원 사무관으로 근무했는데, 이모의 월급날은 12일이었다. (하지만 넘치는 프롤레타리아 정신으로 노조결정의 주역으로 선봉에 섰다가 짤렸다는 것은 비밀)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내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어렸을 적의 난 이모가 월급받는 날이 좋았다. 이모는 월급받는 날이면 우리집에 들러 나와 오빠를 예쁘게 입혀 양식집으로 향했다. 양식집에는 함박스테이크, 돈까스.... 아.. 2개 메뉴는 기억이 안난다. 오빠한테 물어봐야 겠다. 아무튼 4개의 메뉴가 전부였던 언덕위에 있는 양식집에 우리를 데리고 갔다. 난 그 양식집에서 메뉴판을 보며 항상 많은 번뇌와 고민을 했지만, 선택은 결국 이모를 따라 '돈가스'였다. 그리고 어린시절부터 개념없고 싸가지 없었던 나의 친 오빠는 제일 비싼 함박스테이크를 먹었었고.


이모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양식집에서 목에 수건을 끼워야 한다든지, 왼손에 포크, 오른손에 나이프를 들고 먹어야 한다든지.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스프는 안쪽에서 밖으로 먹어야 한다는 거였는데, 이모 역시 이것을 아주 중시했다.  그리고 양식집에서 나오면 슈퍼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으로 갔다.

6살이었지만, 그 밤들의 기억은 언제나 아련하다.







이모는 우리 형제에게 용돈도 많이 줬다. 집이 잘 살던 어린시절에도 많이 줬지만, 우리집이 폭삭 망한 후에도 용돈을 많이 줬다. 집이 폭삭 망한 후에 용돈을 주는 사람은 사실 이모밖에 없었다.


한동안 부모님은 우리를 삼촉댁에 맡겨두고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셨는데, 그때 우리형제를 돌보러 삼촌집에 왔던 사람도 이모가 유일하다. 난 그때 이모가 오는 날이 좋았다.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던 그때 그 공간에서, 이모가 오는 날이면 부모님이라도 만난 듯 기가 살았다. 시험지 백점을 맞아도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던 삼촌집에서 난 백점맞은 시험지를 다 모아뒀다가 이모가 오는 날 이모한테 자랑했다. 그럼 이모는 잘했다고 용돈을 줬는데, 원래 주려고 했던 용돈인지 백점맞아서 받은 용돈인지 모르겠지만 이모 덕분에 난 여전히 공부를 잘했는지도(갑자기 왠 지자랑...) 모르겠다.



우리집의 가난은 꽤 오래 지속되었기에, 친척들 중 누군가는 어린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삼촌집에 살고 있는 나를 한번 쓱 보더니 "넌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에 가면 되겠다."라고 말했다.

난 그말에 무척 충격을 받았고,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펑펑 울었다. 이모는 그날밤 나를 찾아와 등을 토닥이며며 "선영아, 내가 대학 보내줄테니 걱정말고 공부나 해. 쓸데없는 걱정한다."라며 안심시켜 줬다.


내 대학 첫번째 등록금은 이모가 입금했다.


언젠가. 난 다시 태어나도 이모의 조카로 태어났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지금도 살짝 삐뚤어진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난 이모가 없었다면 조금은 더 삐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은 이모를 보면 화가 난다.


하지만.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나 어렸을 땐 항상 방실방실 웃어서 별명이 '방실이'였다는 이모인데. 우리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살면서도, 이모를 너무 오래 혼자두어 더이상 방실이가 아닌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엄마도 그런 생각이 든단다.


지난 인도 여행이후 엄마가 전화왔다.


"선영아, 이모가 전보단 훨씬 부드러워지고 즐거워보이더라."

"왜?"

"여행갈 생각하면 즐겁다고 하네. 그리고 선영이 너한테 고맙다고 하드라."

"왜 나한테 고마워?"

"같이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전해 달라드라."


여행을 해서 좋았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서 좋았다는 이모의 말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어렸을 때 내가 외롭고 힘들때 항상 날 돌봐주던 이모를 다 큰 나는 더이상 챙기지 않았던 것 같아서.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이모랑 여행할꺼다.

같이 맛있는것을 먹고, 같이 좋은 것을 보면서

무엇보다 함께 하기 위해.


하지만 이모 때문에 24시간 빡쳐있을 것이 분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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