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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르타르 Jul 27. 2017

002. 현실에 지칠 때 우리는 꿈속으로 떠난다

영화 <중경삼림>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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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에는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숫자에 얽매여 산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아침 몇 시에는 출근을 해야 하고, 전기요금 얼마를 내야 하며, 약속시간 몇 시에 늦지 않으려고 뛰며, 다가오는 마감시간에 손을 더 바쁘게 놀리기도 한다. 숫자 몇 개로 이루어진 학번을 가진 학생은 0에서 4.5 사이 숫자 때문에 울고 웃으며, 남은 학기가 몇 학기, 채워야 할 학점이 몇 학점인지를 센다. 숫자가 생기고 나서부터 우리는 더 불안해졌다. 산업 사회가 되고, 물건 얼마만큼을 시간에 맞춰서 주고받아야 하게 되면서 불안은 더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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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에피소드 속 주인공, 하지무와 금발 여자도 숫자가 주는 강박관념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무는 하지무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233번 경찰로 불릴 때가 많다. 그는 여자친구 메이와 헤어졌다. 그는 실연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매일 그녀 집에 전화를 했고, 참을 수 없을 땐 그녀 집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무는 자기 생일인 5월 1일까지만 메이를 기다리기로 정했다. 그는 그렇게 정한 순간부터 강박관념을 안고 살아간다. 병적으로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찾아 모았다. 5월 1일 하루 전에는 조급한 마음으로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찾는다. 편의점 주인은 기한이 다 된 통조림은 팔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무는 편의점 주인에게 화를 내고, 편의점 주인도 유통기한 따위 없으면 나도 일 더 안 해도 된다고 도리어 짜증을 낸다.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내일이 유통기한인 통조림을 찾게 되고, 5월 1일이 온 순간 그는 모아뒀던 30개의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조리 먹어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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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 여자도 숫자에 쫓겨 산다. 마약 밀매를 하는 그녀는 언제까지 거래를 마쳐야 한다. 일을 하는데 드는 비용을 신경 써야 하고, 마약 밀매에 이용할 사람들 수도 관리해야 한다. 운반인들 몸에 마약을 숨기고 그들을 외국으로 출국시키려고 수속을 밟는 도중에 운반인들이 도망간다. 마감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은 초조해진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사라진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솔직하게 얘기를 해주지 않자 딸을 유괴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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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들이 넘치다 보면 그 강박관념 때문에 기분이 아찔해진다. 화면이 뚝뚝 끊기는 장면들을 보면서는 그 아찔한 기분마저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은 만년쯤으로 하고 싶다'는 하지무의 고백은 기본적으로 더 이상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숫자가 주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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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가위는 꿈속으로 떠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사실 꿈꾸는 게 아니라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에피소드다. 여기에서 남자 주인공 663번 경찰도 여자친구와 이별한 상황을 겪는다. 그도 실연 때문에 아픔을 겪는데 이 남자는 하지무보다 상태가 더 심각하다. 수건을 보며 왜 우냐고 묻고, 많이 사용해 홀쭉해진 비누를 보며 ‘그래도 힘내야지’라고 중얼거린다. 상처가 너무 크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더 이해 안 되는 건 여기서 부터다. 경찰 663이 자주 가는 패스트푸드점에는 이라는 종업원이 있다. 페이는 몰래 경찰 663의 집에 가서 청소도 하고 집을 꾸미기도 한다. 경찰 663은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한 날은 자기 집에 들어오려는 페이를 문 앞에서 마주친다. 그런데도 처음에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다 나중엔 집 안까지 데려와 다리 마사지까지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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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슨 <전등신화>나 <금오신화> 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California Dreamin’’이나 ‘몽중인(夢中人)’이 계속해서 배경음악으로 깔리는데 그 노래 제목처럼 꿈만 같은 이야기다. 심지어 경찰 663은 페이에게 호감을 느끼고 8시에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의 바에서 만나자고 데이트 신청을 하는데 페이는 7시 15분에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진짜 미국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린다. 금오신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귀신을 만나 비현실적인 사랑하는 꿈을 꾸다 깨는 것처럼 중경삼림에서 경찰 663도 페이를 만나 비현실적인 사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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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현실에서 받는 괴로움을 한 편의 꿈을 꾸며 치유한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은 시간을 야금야금 삼켜, 내가 정해놓은 데드라인은 보이기 시작하는데 뭔가 변화는 보이지 않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중경삼림>을 또 한 번 찾아봤다. 1시간 45분 동안 꿈을 꾼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경찰 663이 정말 꿈을 통해 치유받았다면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왕가위라는 꿈에서 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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