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을 잃어버리는 여행
- 미안한데.. 샴푸 좀 빌려줄래?
포르투갈 숙소에서 만난 외국인에게 첫마디에 샴푸를 빌렸다. 집에서 새는 사회성 밖에서도 샌다고 사회성 제로에 수렴하는 내가 처음 만난 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샴푸를 빌리는 초고단위 사회성을 발휘하게 될 줄이야. 이게 다 오지 않은 가방 때문이었다. 인천을 떠나 암스테르담을 거쳐 포르투갈로 왔어야 할 가방은 주인을 두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여행 가방 분실의 버뮤다 삼각지대라는 파리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가. 캐리어도 아니고 배낭이라 짐으로 부치지 않고 기내 탑승을 할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수화물을 부쳤던가. 포르투 공항에서 짐 나오는 곳이 텅 빌 때까지 멍하지 서있었다. 어쩐지 안 올 것 같더라니...
수많은 짐을 부쳤고, 갈아타는 비행도 많았지만 한 번도 설마, 어쩌면, 진짜 짐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어쩐지 가방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 말고도 몇 명이 짐이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로의 눈빛으로 황당함을 교환하면서 분실신고센터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덤덤하게 분실신고를 한 후 도착한 숙소. 정리할 짐도 갈아입을 옷도 없으니 오히려 느긋했다.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에는 여권과, 휴대폰, 휴대용 칫솔과 비행기 안에서 쓰려던 작은 스케치북뿐이었다.
삶이란 늘 결과를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 결과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누추하고 졸렬한 불안일 수밖에 없다. 여행 첫날밤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누웠다. 내 배낭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다음날 아침 마음은 훨씬 편안했다. 공동 샤워실에 누군가 두고 간 비누가 있어서 몸을 씻었고, 치약을 빌려 이를 닦았다. 여행자들은 모두 그 정도의 아량쯤은 기본 장착이라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지 않은가. 아무것도 덧바르지 않은 맨얼굴은 조금 허전했지만 여행자다웠고, 포르투의 아침은 필요할 것이 없을 만큼 한없이 가벼웠다.
배낭은 이틀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지만 여행은 별문제 없이 계속되었다. 현금이 있었지만 치약 이외에는 사야 할 것이 없었고, 가방이 없다는 것조차 희미해졌다. 사흘째 되던 날 리셉션에 놓인 배낭을 발견했다. 스텝에게 물으니 저게 네 것이냐고 되묻는다. 아니. 가방이 왔으면 빨리 주인을 찾아줘야지... 하지만 서운함은 잠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와 있는 배낭을 보며 그래, 살아 돌아왔으면 됐지. 하는 생각에 피식 웃어버렸다. 돌아온 배낭은 ’급한 것‘이라는 빨간딱지와 함께 곳곳에 검댕이들이 묻어있었다. 어느 이름 모를 공항들을 헤매다가 다시 비행기 짐칸에 실려 나에게 돌아오기까지 몸고생 마음고생했을 녀석을 터덜터덜 메고 숙소에 눕혀주었다. 그 아이도 그날은 다리를 뻗고 오랜만에 푹 잠들었을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일이다. 인생은 '설마', 보다 '어쩌면'에 가깝고, '혹시'보다 '역시' '그다지'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밖에서 바라보면, 혹은 끝이 나고 나면 그럭저럭 받아들여지게 되기도 하지만 그 상황의 한가운데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무언가를 잃어버려서 인생을 완전히 망칠만할 일도 별로 없고, 그렇게 '급한 것'처럼 뛰어다닐 일도 많지 않으며,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도 없다. 살아있는 한.
한동안 힘든 일로 두문불출하던 때가 있었다. 오랜 침묵을 지나 겨우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친구들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나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아마 잃어버렸던, 그러나 돌아오리라 믿었던 가방을 다시 찾은 그런 기분이었을까. 어딘가를 혼자 헤매다 돌아온 내 꼴을 보고 그들은 돌아왔으면 됐다. 하는 눈빛이었다. 내 몸에 묻은 검댕이 같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나는 별로 대단할 것 없는, 낡은 옷가지 몇 개뿐인 가방처럼 그제야 웅크렸던 몸을 조금 폈다.
그래, 여행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여행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생때같은 돈을 도둑맞고, 친근한 현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엉뚱한 길을 잘못 들어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어이없는 실수로 비행기를 놓치고, 예약한 숙소가 문을 닫는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한 여행자들이 있을 것이다. 다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은 그런 이들.
마음은 찢기고, 세상은 지옥 같고, 사람은 모두 도둑놈 같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저앉아 울고 싶을 때... 그래도 이 여행을 끝내 이어가라. 말해주고 싶다.
치약을 빌리고, 샴푸를 얻어 쓰고, 허름한 숙소에서 하룻밤을 구걸하거나, 입던 옷을 사흘째 입고 잠드는 날이면 어떤가. 어제보다 더 나쁜 하루를 보내고 내일도 별다를 것 없으면 어떤가. 실성한 웃음을 허허, 웃으면서 찢어진 배낭을 손수건으로 묶고서라도 기어이 여행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문득 돌아온 배낭이 반갑기도 하지만, 사실 그 배낭 없이도 여행은 계속되었던 시간들이었다. 심지어 훨씬 가벼워진 몸으로 걷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애타게 기다리던 그 가방에는 꼭 있지 않아도 될 것들로 가득 차 너무 무겁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리는 것도 삶을 계속하는 한 형태일지도.
우리의 여행은 어차피 설마, 어쩌면, 그다지.. 들의 연속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