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럽고 어설픈 첫 페이지
새해 달력에 그려진 동그라미들을 확인해본다. 가족들과 친구들의 생일, 업무에 필요한 몇몇 날짜들이다. 그러다 아무 메모가 없는 동그라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날이었더라. 누군가의 생일인지 오래된 약속인지 더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회사를 처음 출근하던 입사일이었다. 이제는 출근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되어버렸고, 아침마다 시큰둥한 마음으로 집을 나서지 않던가. 게다가 한 직장에 오랫동안 몸 담았다는 것이 별로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시대이다. 어느새 낡은 직장인이 되어버린 탓에 오래된 처음. 을 기억하고 싶은 동그라미였을까?
무엇의 '처음'을 떠올려 본지 꽤 오래되었다. 처음 인사를 하고, 처음 책상에 앉고, 처음 결재를 받았을 그 날. 내 전화를 처음 받았던 이는 누구였을까. 첫 업무는 무엇이었던가. 그걸 잘 수행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서툴렀고 긴장했으며 그럼에도 해보고자 했던 시간들이 기억 속에 뭉뚱그려져 있을 뿐.
첫 여행지를 달력에 표시하던 날이 내게도 있었을 것이다. 첫 여행이 앙코르 와트였던 것은 영화 <화양연화> 때문이었던 것 같다. <In the Mood for Love>가 흐르는 화면 위로 느리게 골목길을 엇갈려 지나던 두 남녀. 사랑을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시간의 얼개를 지나, 급기야 있지도 않은 이별을 연습하던 여자가 흐느낄 때. 이 영화가 마음에 오래 남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국 엇갈린 채 다른 시간에 남겨진 남자는 영화의 마지막에 어느 오랜 사원을 찾아가 돌무더기에 대고 비밀을 영원히 봉인한 후 걸어나온다. 저기가 어디일까. 막연히 그곳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외에 가본 적도 없고, 앙코르 와트가 캄보디아에 있는지도 몰랐던 개구리이자, 생각은 길고 행동은 더딘 내가 어떻게 용기를 냈는지. 어쩌면 그때 앙코르 와트는 여행지라기보다 보다는 아득히 먼 시공간을 뜻하는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첫 여행은 어설펐지만 행복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름다움을 냉정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앙코르 와트가 잘 보이는 포토존으로 이끌어 준 소녀는 현지에서 우연히 만난 예쁘고 착한 아이가 아니라 흔한 삐끼 중 한 명이었고, 똔레삽 호수에서 배 위에 낭만적으로 앉아있던 소년도 뱃사공 아빠를 따라 나온 귀여운 아들이 아니라 어엿하게 제 몫을 하고 있던 한 명의 일꾼이란 걸 그때는 몰랐다. 이름도 잘 모르는 길거리 음식을 아무렇게나 먹고 다니고,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앙코르 그림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념품으로 산 일 등등... 초보가 아니면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을 기억들조차 아름답게 남았다.
훗날 유럽에 가보고 알게 되었다. 첫 여행이 앙코르 와트였다는 것이 내게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유럽은 데이트 코스를 막힘없이 안내하는 능숙한 연인 같다면, 앙코르 와트는 서툴지만 설렘으로 가득한 첫 연인 같달까. 유럽의 수많은 정돈된 박물관을 입장하다보면 안다. 거대한 문명의 원시림을 땀 흘리며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앙코르 와트를 함께 가보자고 말했던 사람이 있었다. 한번도 먼 나라를 여행해본 적이 없던 이였다. 그는 바빴고, 인생의 계획이 많았다. 그는 상기된 내 오래된 첫 여행 이야기를 듣고는 앙코르 와트가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앙코르 와트가 그려진 담배갑을 보여주며 여기,라고 말해주었다. 이제 막 담배를 끊은 그는 옛날 거북선이나 한라산 담배 같은 촌스런 맛일 것 같다고 했다. 꼭 당신과 함께 다시 가보고 싶다는 말에, 왜 하필 그곳이냐고 물었다. 나는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냥. 첫 여행이니까. 라고 말했다. 결국 그와 나는 앙코르 와트에 가지 못했다. 그는 지금쯤 그 많던 계획들을 이루었을까? 아직 뜯어보지 않은 앙코르 담배는 거북선 같은 맛일지 한라산 같은 맛일지 알 수 없는 채 내게 남았다.
때론 떠올려본다. 왜 하필 앙코르 와트였는지. 사실 낭만적인 첫 여행의 기억을 걷어내면 너무 더웠고, 낯설고 서툴기만 한 여행이었다. 첫 끼니로 무엇을 먹었는지, 잦았던 비를 어떻게 피하고, 어디쯤을 걸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순수한 눈빛으로 모든 것을 담고자 했고, 닿는 곳 어디나 충만하고 새로웠다.
왜 하필 그였는지 역시 잘 모르겠다. 어디를 걷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이제는 흐릿하다. 그저 어쩔 줄 모르는 애틋함으로 기어이 첫 마음을 지키고자 애썼던 시간들이 남았다.
어느날 내 生도 돌아보면 내 첫 출근처럼. 내 첫 여행지처럼 느껴질까? 서툴렀고, 순수했으며 그럼에도 기어이 제대로 삶을 사랑해보고자 했던 마음들이 조금은 아름답게 담겨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生의 끝에 한번쯤은 오래된 풀들이 자라는 성벽에, 가장 아팠으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비밀을 가만히 고하고 싶은 순간이 있기를...
그래, 이게 겨우 나의 첫 生이지 않은가.
내 生이 처음이었다는 걸, 그 생이 꽤 행운이었다는 걸 언제쯤 알게될까? 다른 생을 맞아봐야 아는 거라면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그러하듯이.
지도 없이 길을 읽는 사람처럼 가야할 시간이 앞에 놓여있다.
두 손으로 받아 들어도 자꾸 넘쳐 흐르는 이 시간을 지나면, 곧 아쉽게 남은 순간들을 모아 쥘 시간이 올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시간을 첫 여행처럼, 첫 눈, 첫 마음처럼. 설레게 펼쳐보고 싶다.
이제 겨우 달력의 첫 페이지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