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이 나를 바꿨고 이젠 내가 바꿀 차례
확장과 확산에도 언젠가는 임계점이 존재한다.
물도 100°C 이상에서 액체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임계점이 있고, 사람들이 평범한 하루를 살기 위해 매일 사용하는 단어 개수는 최대 삼만 개(여자는 삼만 단어, 남자는 7000 단어)로 한정되고. 신은 하나인데 모든 인간을 돌볼 손이 모자라 ‘엄마’라는 존재를 창조했듯이, 우리의 관심이 닿을 수 있는 레이다의 너비와 반경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나의 관심의 안테나에 발이 달려있는 생명체라고 가정한다면, 3-4 년 전의 내 관심레이다는 발이 8개가 달린 괴물 같았다. 머리는 하나인데 내 시선을 빼앗는 요소들이 외부에 넘쳐나니 쉬지 않고 정신적으로 항상 바쁜 거미.
과학기술이 나를 통제하면서 생긴 변화다. 이 망할 놈의 스마트 폰. 스마트폰을 사용한 지도 벌써 15년. 정리도 잘 안되고 엉켜버린 일의 순서에 무능력해지고 느려진 나의 모습에 당황하는 빈도도 늘어났다. 나의 반복되는 행동패턴은 이랬다.
10분 정도 책을 읽다가 슬슬 목이 말라 냉장고로 간다. 주스를 따라 마시고 갈증이 해결되면 깨진 흐름의 틈으로 어김없이 내재된 습관이 스마트 폰을 집게 만든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소셜 미디어 앱을 연다. 몇 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지인들의 큐레이팅된 일상과 귀여운 강아지들을 훑어본다. 좋아하는 삽화 작가의 작업과정도 넋을 놓고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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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대화를 나누는데 대화 내용에 집중을 못할 때도 많아졌다. 내용도 이해 못 하고 있으면서 관성에 목을 끄덕끄덕한다. "저기 미안한데 못 들었어. 다시 얘기해 줄래?" 되묻는 빈도도 많아졌다.
성인 ADHD가 요즘 티비에서도 자주 언급이 된다. 나도 그런 거 아니야? 의심도 해봤다. 가끔은 글을 쓸 때 두 시간은 기본으로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니 그건 아닐 거라고 안심했다. 그리고 합리화시켰다.
‘이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야. 현대사회에 사는데 안 이런 사람이 있어? 정신을 분산시키고 산란시켜야 진정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현대인이지! 안 그래?’
중국발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을 보니. 내 머릿속 같았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임계점에 다다른 거다. 오른손에 쥐어진 스마트 폰을 노려보았다. 스마트폰은 침대에서 일어나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내 손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전화기능은 전체 사용패턴으로 볼 때 ‘폰“이라고 부르기엔 비중이 작다. 말이 좋아 스마트폰이지, 텔레비전과 노트북을 항상 들고 다니는 셈이다. 아침에 눈 떠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지하철 안에서 서 있건, 앉아있건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만 보고 있다. 눈은 떴지만 죽어있는 사람들 같았다. 서로 간의 교감의 여지조차 없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보였다. 고요한 밤은 없고 정오만 존재하는 듯 살던 나. 정신을 좀 잠재우고 차분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여유와 쉼의 공백도 스마트폰이 주는 편안함과 알고리즘으로 점철된 흥밋거리로 메워버리곤 했던 습관을 버리고 싶었다.
깨진 내면과 분산된 집중력의 발란스를 되찾고 싶었다. 글을 쓰려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문제였다. 내 미래가 달린 문제였다. 난 다짐했다. 저녁 9시-10시 이후에는 핸드폰은 그저 전화기라는 걸 인지시키고 방해되는 앱들을 모두 꺼버렸다. 급하지 않은 채팅 창에는 답을 하지 않고, 소셜 미디어 창은 열지 않았다. 창을 연다는 것은 내가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세상에 내 정신을 강제로 등 떠밀어버리는 거다.
그렇게 한지 두어 달 정도 된 현재. 온전한 쉼이 어떤 것인지, 잊고 있던 느슨함의 감각을 되찾았다. 스미트폰 세상에서 뚜렷한 목적 없이 떠도는 나의 시선과 관심은 불안감만 증가시킨다. 스마트폰 세상은 내 검지만 까딱해도 너무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나의 명령에 복종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시계 분침처럼 느리다. 이게 제 속도인 것을 잊고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