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9 배터리의 재발견
가끔은 우연히 내 일생에 무용지물이라 생각했던 물건이 곤란한 상황에서 유용한 것으로 둔갑한다. 한 날 배터리, 그것도 내 삶의 반경에 들어온 적도 없던 V9 배터리가 영웅처럼 갇힌 나를 구해줬다.
날이 좋았던 어느 주말, 작업실 문이 잠겨버렸다. 난. 갇혀버렸다. 안이 아니라 문밖에서.
건너편 편의점에서 구매해 온 새우탕과 빼빼로를 한 손에 들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도어락이 아얘 나가버려 번호조차 눌러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일요일
텅 빈 사무실.
건물 소장님은 휴무.
'하 젠장. 미리 갈아줬어야 했는데. 근데 무슨 경고가 왜 이리 짧아?'
작업실 문의 배터리 수명이 다 된 거다. 오전에 작업실에 들어갈 때 현관문 도어락 키패드에서 '학교종이 땡땡땡' 멜로디가 울렸었다. 처음 들어본 알림음에 당황했지만, 급할 건 없었다. 오늘 집에 가기 전에만 갈면 되지…. 하고 잠시 무시했다. 작업실에는 여분의 AA 건전지가 충분하게 있었으니까.
출출해서 편의점을 다녀오니 이런 상황이 닥친 거다. 세월이 오래된 도어락의 사정이 급하다는 걸 내가 알아주지 못했다.
문 따는 기사를 불러야 하나, 일요일 주말이라 값을 더 많이 부를 건데, 이리저리 고민을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 검색창을 찾아보았다.
분명 이 세상에 나보다 더 게으르고 행동도 느리고, 최악의 상황을 겪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을 해결한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역시! "방전된 도어락 여는 법”이라는 제목의 게시물 리스트가 주르륵 나왔다.
아직 해결이 난 것도 아닌데 안심이 됐다.
방전된 도어락을 깨우는 해결법은 생각보다 너무 간단했다.
필요한 건 오롯이 V9 배터리.
직사각형으로 생긴 V9 배터리의 돼지 코처럼 생긴 분분을 도어락 키패드 하단에 있는 구멍에 가져다 대면 전류가 흘러 방전된 키패드를 깨울 수 있다 물론 임시적일 뿐이다. 숨이 멎은 사람을 심폐 소생하듯이. 도어락이 잠시 깨어나면 비밀번호를 바로 눌러야 한다.
이게 진짜 된다고? 반신반의했지만 이런 성보를 괜히 올려놓았을 리 없고, 과학과 담쌓은 지 20여 년 되었지만 이 정도는 두리뭉실 이해할 수 있는 촉은 있었다.
곧장 다시 건물 건너편에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V9 배터리를 사서 현관문 앞에 서 도어락을 찬찬히 보았다. 이 배터리를 댈만한 그럴듯한 홈이 있는지.
'제발 있어라. 있어라.'
생각보다 금세 찾았다. 키패드 하단에 진짜 홈이 두 개가 파인 부분이 있는 거다.
살면서 도어락에 이런 분분이 있을 거라고 관심조차 두지 않고 살았건만. V9 배터리의 비닐을 뜯어 돼지코처럼 생긴 부분을 두 홈에 가져다 댔다.
띠리릿!!
경쾌한 알림음을 내며 번호판에 파란불이 영롱하게 들어왔다. 미치게 기뻤다.
다시 살아난 도어락이 순식간에 또 꺼질 까봐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큼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띠,띠,띠리릿!
죽어 있던 문이 열렸다.
작업실 내부로 들어오니 당황해서 올라왔던 긴장감이 확 풀렸다.
난 곧장 서랍장으로 달려가 배터리를 찾아 도어락 배터리를 새것으로 갈아주었다.
학교종이 땡땡땡을 울리며 얄짤없이 셔터를 내려버린 도어락.
한 순간엔 당황해서 원망스러웠지만 4000원도 안 되는 값으로 열쇠 기사를 부르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던 경험을 얻었다.
작업실 문을 여는데 임무를 다 한 V9배터리는 그날 한 번 사용되고 내 서랍 한쪽 구석에서 방전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