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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연재 Dec 12. 2020

다시 봤어요... 제스퍼 존스

팝 아티스트 제스퍼 존스의 기호적 회화

연예인들 중 빼어난 외모와 매력으로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사는 사람을 본다.

누가 봐도 아름답고 잘생긴 외모 혹은 오스카 상을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의 연기력이나 끼 때문에 유명해졌다고 한들, ‘흠… 왜?’ 하며 되묻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다들 예쁘다고 하니 이쁘구나 한다.

대중이 인정한다고 한들 내가 그 대중의 한 명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다가 특별히 할 거 없이 빈둥 거리던 날 갑자기 나의 취향을 반영하는 알고리즘 덕에 추천작품에 뜬 영화를 본다. 하필 모두가 좋아하고 인정하는 배우가 나와 우연치 않게 그/ 그녀가 맡은 배역에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다. 그 배우의 이름 석자가 줬던 선입견은 사라지고 그 배우에 대한 관심이 언제부터 있었던 냥 과할 정도로 감정 몰입을 하며 어느새 휴지로 눈물을 훔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하.. 저 배우는 대단해. 참 예쁜 사람이구나..(남자일 경우) 몰랐는데 엄청 매력 있네. 그래서 인기가 있구나.’ 하며 납득을 한다.


미술에서도 내게 이러한 작품/ 작가들이 있는데 바로 미국 출생 작가 제스퍼 존스 (Jasper Johns)다. 

시카고 미술관에 들락날락할 시절, 즐겨 가던 모던 아트 컬렉션 전시장에서 항상 보이던 제스퍼 존스의 작품은 항상 내 시선에 걸리적거렸다. 알긴 알지만, 모르는 척하기에는 유명하기는 한데, 왜 유명한지는 모르겠고, 그렇다고 더 알고자 하기에는 시각적으로 개인적인 취향도 아니었다. 사실 유명하다고 하니, 알고 싶은 마음에 공부하고자 모던 아트 책을 몇 권 정독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팝 아트 같이 생기지도 않은 이 작가의 작품은 팝 아트라는 분류로 넣어져 있는데, 심미적으로 앤디 워홀만큼의 그래픽적 요소도 덜했다. 한마디로 심미적으로 아이 캐칭 (eye-catching) 요소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그런데 신기하게, 십여 년이 지난 최근에 새삼스럽게 이 작가의 작품이 너무나 혁명적이라는 생각에 무릎을 탁 치게 했다. “와 씨, 이 작가 천재네!”라는 놀라움의 탄성이 날 정도로 이 작가는 그에 걸맞은 명성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역시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을 통감한다. 



제스퍼 존스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회화 작품이다. 평면작업이라는 뜻이다. 그 평면에는 숫자, 과녁, 국기, 지도 등 우리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어렵지 않게 보이는 대상을 주제로 삼는다.


성조기(flag), 신문 콜라지, 유책, 왁스, 107.3 ×153.8cm, 1954~55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성조기> 작품을 보았다면, 상당히 애국심이 강한 작가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납작한 국기를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 담았으니 별로 어렵지는 않았겠는데?’ 라며 간단한 감상평을 툭 던져본다. 그래도 국기보다는 조금은 깊이 있게 파헤쳐보고자 ‘물감을 상당히 두껍게 썼네?’ 하며 감상평을 덧붙여볼 수 있다. 실제로 납화법(wax encaustic)을 이용해 두꺼운 질감을 살리며 채색을 했다. 색과 붓터치가 지나간 질감은 온도에 예민한 왁스가 굳어버려 보존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그 두께감을 캐서 레이저 쏘듯 쳐다보아도 답은 안 나온다.


석고상과 과녁. 캔버스에 엔코스틱과 콜라주 및 오브제. 129.5×111.8cm. 1955.

한 단계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왜 제스퍼 존스는 공통적으로 저렇게 평평한 오브제들을 주제로 잡은 것일까?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데 파헤쳐 보면 별거 없어 보이는 사물들을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입체성이 있는 사물보다 평편한 것들에는 시선을 오래 두지 않으며 신경을 덜 쓴다. 그만큼 익숙해져 버린 ‘기호’ 같은 것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무디게 인식하고 한치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제스퍼는 특히 대량소비사회로 진입한 1900년 중반에 넘쳐나는 상업적 광고와 물질에 새로운 자극들에 노출되어 감각이 무분별해진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제스퍼가 택한 주제들은 너무나 밋밋하다. 더 나아갈 국가의 아이덴티티를 대표하는 기호인 깃발, 지구가 통째로 바뀌지 않는 한 변동 없을 미국의 지도, 범지구적으로 통용되는 숫자나 과녁 그리고 생각 없이 노트에 끄적대는 빗금 패턴 등 새로운 의미를 돌출시킬 만한 여지는 없어 보인다. 


지도, 1961
사채와 거울 2, 1974

다다이즘 대표 작가 뒤샹(Duchamps)은 어느 날 변기를 가져와 본인 싸인을 멋있게 한 뒤 작품이라고 말한 후부터, 오브제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 혁명적 변화를 환기시킨다. 재현된 이미지, 어떠한 대상을 그대로 모방하는 표현만이 미술이라는 고리타분하고 직선적인 개념을 파괴한 혁신적인 사건이다.


존스는 이와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이미 존재하는  물질적 사물을 다시 예술을 담는 평면의 무대장으로 끌어와 예술이 만들어야 하는 ‘의미’ 따위를 과감히 삭제한다. 이미 삭제되어 ‘무’가 되어버린 듯한 의미를 우리 관람자는 찾으려고 무단히 애를 쓰도록 만든다. 앞에서도 관찰하고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도 관찰해본다. 바로 그 의미는 관찰자의 개입으로부터 다시 자라난다. 이 지점으로부터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며 다원적 의미가 생산되는데, 존스의 이러한 시도는 개념미술의 탄생을 알리는 동시에 포스트 모던아트가 시작되는 발판을 만든 셈이다.

 “사물(오브제)을 챙긴다. 그 사물에 무언가를 해본다.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를 시도한다”라는 작업 철학으로 인해 평범한 아이디어가 환골탈태하듯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낸다. 난 그가 만들어낸 이 흐름을 아하! 하고 알게 되기까지 존스의 작품을 째려보다 검은 자가 사라질 정도였다.


이러한 맥락을 모르고 그의 작품을 보게 되면, 단순히 사회적 배경으로 그의 작품을 해석하려고 한다. 또한 미술사 책을 보다 보면, 짧은 설명이 뭔가 빠져있는 듯한 아쉬움을 남긴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어언 십여 년이 걸린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참 오래 걸렸다 싶다. 하지만 지금이나마 그의 작품이 미술사 흐름 속 혁명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 내심 기쁘다. 

2010년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도 받을 정도로 제스퍼 존스는 미국의 미술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인 것은 자명하다. 이제 그가 미술작품에 던진 반향에 대응할 수 있다 생각하니 그의 작품에 애정이 생겼다. 그냥 그렇고 그래서 유명한 사람이고 역사적인 작품이 아닌, 나의 베스트 작가 리스트에 들어오게 됐다는 사실이 즐겁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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