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연재 Mar 29. 2021

루이 비제 르 브륑

프랑스 신고전주의 여성 작가.

시대를 잘 못 타고 태어난 여성 화가. 

18 세기 프랑스의 귀족들 얼굴을 아름답게 표현한 화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속 작가.

루이 비제 르 브륑  
Elisabeth Louise Vigée Le Brun ((1755-1842)




르 브륑 초상화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자화상


    18 세기 초상화 전문 아티스트 


루이 비제 르 브륑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프랑스 출생 여성 화가다. 르 브륑의 손을 거치면 그 누가 되든 보드라운 피부와 귀티 나는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 이런 재주 덕분에  많은 상류층 사람들은 르 브륑에게 초상화 의뢰를 했다. 특히 상류층 여성들의 초상화 작가로 유명했다. 사실 여성 작가에게 이러한 기회가 오기란 흔치 않다. 단순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끝나버리기 마련이지만 르 브륑은 전업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600여 개가 넘는 초상화와 200여 개의 풍경화를 남겼으니 상당히 다작을 한 셈이다. 


르 브륑의 작품들의 특징은 신고전주의의 형식적이고 그리스 조각 美를 풍기 듯 매끄럽게 깎인 느낌이 들면서도 보송하고 사랑스러운 느낌도 가미되었다. 신고전주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녀의 스승이 바로 프랑스혁명의 중심에 있던 신고전주의 작가 자크 루이 다비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르 브륑이 그린 초상화 속 인물들은 중요한 사람인 듯 무게 감이 느껴지고 이상적인 형태를 그대로 나타낸다. 동시에 살짝 경쾌하면서 우아한 로코코 스타일 이 가미되어 세련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유럽의 귀족들, 배우, 작가들이 그녀의 대부분의 초상화 고객들이었다는 점은 괄목할만한 그녀만의 재능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 1787


VVIP 고객, 마리 앙투아네트 여왕


르 브륑은 그녀의 그림에서 느껴지듯 미적인 센스, 자연스러운 대화 스킬, 비즈니스에 대한 감각과 네트워킹 스킬이 뛰어났다. 따라서 자신의 고객 혹은 모델이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재주로 여왕까지 사로잡았다. 고객들 중에서 가장 큰 고객이자 후원자였던 인물은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와이프, 마리 앙투아네트 여왕이었는데, 이때부터 르 브륑의 인생이 180도 바뀐다. 당시 여성 화가들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로열 아카데미를 들어갈 수 있게 된다. 특히나 아트 딜러에게 시집을 간 르 브륑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여왕의 아낌없는 지지와 후원으로 공식적인 미술 트레이닝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했다.


1778년 마리 앙투아네트 여왕은 비제 르 브륑을 자신의 공식 초상화 작가로 채택하였고, 요즘으로 말하면 전담 포토그래퍼로 간택받았다고 할 수 있다. 르 브륑은 여왕의 장점과 돋보이고 싶은 부분을 극대화시켜주는 안성맞춤 서비스를 제공했다. 

아름다운 팔의 선과 작은 손과 발을 가진 여왕의 모습은 그림에서 엿볼 수 있다. 여왕은 키가 크고 머리를 꼿꼿하게 들고 다녔는데 르 브륑은 이러한 특징을 잘 잡아 여왕의 우아함과 기품을 그림 속에서 표현했다. 합스부르그 가문의 재앙이자 특징이었던 주걱턱은 가뿐하게 생략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녀가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한다는 걸 잘 알 것이고, 그녀가 내게 베푼 친절은 내 평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추억들 중 하나로 남아있다.
-<로코코 다이어리> 中



르 브륑이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


파니에 스타일의 흰 세틴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다. 드레스는 리본과 금색 테슬로 장식된 화려한 드레스로 여왕의 위엄과 화려함을 나타낸다. 아이들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얼굴이기도 했던 여왕의 모습을 화려하고 상징적으로 재현한 모습이 엿보인다.  

이와는 반대로 르브륑은 개인적으로 평범한 드레스를 입은 왕비의 모습을 더 좋아했다. 화이트 모슬린 드레스 입고 소매를 걷어 올린 모습을 좋아했으며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소박한 모습의 여왕을 볼 수 있다. 힘을 빼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진 어린 소녀 같은 느낌이랄까.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열네 살 프랑스에 시집을 와 베르사유의 화려함과 부유함을 누리고 살았다. 그러나 궁정 법도와 호화스러운 사치에 짓눌려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기를 갈망했다. 베르사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작은 마을을 만들어 지냈다. 자신이 좋아하는 식물들과 꽃을 가꾸며 소박하고 자연과 가까이할 수 있는 공간에서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여왕>

문제의 모슬린 드레스


18세기 후기 무렵 모슬린 드레스는 상류층 여성들에게 인기 있던 드레스였다. 수입된 면화 모슬린으로 만든 드레스로 흰색에 가슴에서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스타일이 특징이라 속치마를 입은 모습 같다는 혹평을 받았던 드레스다.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왕비의 패션을 매우 비난했다. 왕비로서의 위엄이 없어 보이기 물론이거니와  왕비의 패션을 덩달아 따라 입을 여성들이 늘어나는데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모슬린은 값비싼 수입산이었기에 국내 생산 실크 소재 드레스 생산이 줄어들면 경제적 타격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불 Lee Bul , <시작>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