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맛소금 통이 되고 싶어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도 등장하듯, 인류의 역사는 거창한 사건들의 연속이라기보다 사소한 적응과 개선이 축적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언어로 소통하고, 문자로 기억하며, 공동체를 구성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작은 변화와 적응은 각자의 환경 위에서 고유의 생활 양식으로 굳어졌고, 우리는 이를 문화라 부릅니다. 이러한 문화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과 인과의 구조를 갖추는 순간, 그것은 역사로 인식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인류의 기록 역시 상당 부분 흔적과 해석에 기반합니다. 청동기와 철기라는 구분은 기술사적 전환을 설명하는 유용한 틀이지만, 금속 가공 기술만으로 인류 문명의 비약을 전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인류의 지속을 가능하게 한 조건은 단일 요소가 아니라 복합적인 요인들의 상호작용에 가깝습니다. 생물학적 진화, 사회적 협력, 물질적 환경, 기술적 축적 등 수많은 요소들 가운데, 저는 그 핵심적 위치에 하나의 능력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의 사고 능력은 기술보다 선행하여 존재했다기보다, 기술의 형성과 해석, 축적 과정 전반에 깊게 관여해온 인지적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삶이 기술 발전에 의해 급격한 변화를 겪어온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술 변화를 가능하게 한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단순한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의 구조와 마주하게 됩니다.
기술은 무엇에 의해 형성되는가.
저는 이 질문의 사유적 토대를 철학에서 찾고자 합니다.
철학은 직접적으로 기계를 생산하지 않으며, 속도나 생산성을 측정하는 학문도 아닙니다. 대신 철학은 기술과 행위의 전제 조건을 질문합니다.
- 왜 필요한가.
- 무엇이 정당한가.
-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판단의 기준을 성찰하는 작업에 가깝고, 답을 제공하기보다 질문의 구조를 정교화하는 학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술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면, 철학은 그 변화가 갖는 의미와 함의를 해석합니다. 문명이 가속된다면, 철학은 그 속도가 전제하는 가치와 기준을 되묻습니다.
물론 철학이 언제나 사후적 역할만 수행해온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철학은 시대 변화를 선도하거나 촉발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많은 경우, 철학은 변화 이후의 해석과 기준 재정립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인류는 지금 ‘인류세’라 불릴 만큼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생각이라는 조건으로 돌아와 봅니다.
한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생물학적 기반 위에서 사회적 자극과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합니다. 그리고 지성체로서, 점차 스스로 사고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발현하게 됩니다.
자연을 관찰하고 원리와 법칙을 탐구하는 행위는 과학으로 체계화되고,
그 지식을 활용해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시도는 공학으로 이어집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해석하는 작업은 사회학으로, 그 관계 속 자원과 이익의 흐름을 탐구하는 과정은 경제학으로 분화됩니다.
반면, 존재와 의미, 가치와 선택의 문제를 성찰하는 영역은 전통적으로 철학의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존재, 의미, 가치, 선택.
이는 사유의 초점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 표현에 가깝지만, 이러한 질문들이 집중되는 장을 우리는 철학이라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이 감정과 행동의 형태로 드러나는 순간, 심리학은 이를 경험적·과학적 틀 속에서 설명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탐구의 장이 펼쳐진 가운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모든 해석의 중심에는 무엇이 놓여야 하는가.
저는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만약 모든 체계를 포괄하는 단일한 기준이 존재한다면 신학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신학은 본질적으로 신념과 경험에 깊게 의존하는 매우 개인적인 영역이며, 보편적 인식 틀로 기능하기에는 제한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나름의 인식 구조를 조심스럽게 설정해봅니다.
저의 중심에는 신학이 놓이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외피로 철학과 과학을 둡니다.
사회적으로 노출된 자아로서의 저는 어쩌면 아몬드 초콜렛과도 비슷할지 모릅니다.
중심핵에는 신학이 있고, 한쪽은 철학이라는 사유의 외피, 다른 한쪽은 과학이라는 설명의 외피가 그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단순화된 표현일지라도, 제 사고 구조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히 유효한 이미지라 느껴집니다.
이 글을 적는 이유 역시 거창하지 않습니다.
철학을 즐기는 사람,
철학을 지닌 사람,
철학에 무관심한 사람,
철학의 효용을 의심하는 사람.
이 서로 다른 관점들이 공존하는 장면 속에서, 저는 철학의 또 다른 기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철학은 모두를 설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세계관이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해석 틀과 대화의 기준을 제공합니다.
자연과 기술, 그리고 미래를 가늠하는 과정에서도, 철학과 과학의 동행은 서로를 교정하는 유용한 장치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미국 대학교의 커리큘럼이 부러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초과학과 철학, 인문학과 예술을 충분히 통과한 뒤 응용 학문으로 나아가는 구조는 단순한 교육 과정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틀을 형성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반면 우리는 종종 너무 이른 단계에서 답을 요구받고, 너무 빠르게 효율을 강요받습니다.
이 좁은 사회 구조 속에서 저는 다른 종류의 유산을 떠올립니다.
만약 다음 세대에게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면,
구체적인 재산보다 세상을 해석하는 눈, 가능성을 감지하는 감각.
그 기반에는 결국 하나의 조건이 놓입니다.
생각의 깊이를 확장하고, 질문의 구조를 정교화하며, 해석의 기준을 성찰하는 학문.
저는 여전히 그 이름을 철학이라 부르며 동경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삶의 기준마저도 글로 남기지 않은 것 뿐 모든 각자의 철학이기도 할겁니다.
생각하는 갈대의 무수한 흔들림이 담긴 파스칼의 '팡세'로부터 벗어나고자 적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