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메로스 '일리아스'
<Tasty G 고전 칼럼 1>
끝나지 않은 이야기
- 호메로스, �일리아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
�일리아스�의 처음 7행이다. 읽기도 어렵고, 뜻을 해석하기는 더욱 난감하다. �일리아스� 해설서와 �일리아스� 읽기 방법서들이 시중에 나와 있지만, 해설서와 방법서를 독파하더라도 �일리아스�는 읽기 어려운 작품이다. 쉽게 읽는 법은 없다.
무등산을 쉽게 오르는 법이 있다. 자동차, 오토바이, 헬기 등을 이용하면 된다. 히말라야를 쉽게 오르는 법은 없다. 탈것을 이용하면 고산병에 걸린다. 이렇듯 �일리아스� 그리고 앞으로 소개할 고전이란 히말라야처럼 힘들이지 않고는 정복할 수 없는 거대성벽의 트로이아다.
쉬운 것은 쉽게 어려운 것은 어렵게 읽고 배워야 진가를 알 수 있다.
이 글은 히말라야 정복을 함께할 약소한 셰르파다.
�일리아스�란 무엇인가?
�일리아스�는 고대 희랍의 영웅 서사시 중 하나다. 15,000행의 방대한 분량을 갖고 있지만 이른바 서사시권(敍事詩圈 epikoskyklos)이라는 큰 전체 중 ‘트로이아 서사시권’이라는 한 부분의 일부다. ‘트로이아 서사시권’은 8편의 서사시로 구성됐다. 그중 첫 번째인 �퀴프리아�(Kypria)는 ‘파리스의 심판’에서부터 희랍군의 트로이아 도착까지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가 바로 �일리아스�다. 우리가 잘 아는 �오뒷세이아� 역시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일곱 번째 서사시다.
대게 �일리아스�를 트로이 전쟁이야기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해 �일리아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한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에서 시작해 트로이아 왕자 헥토르의 장례로 끝난다.
�일리아스�의 모티프는 ‘분노’다.
사납고 자제력 없고 굽힐 줄 모르는, 오직 불멸의 명성만을 추구하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일리아스�를 이끌어간다. �일리아스�는 9년 동안 트로이아 전쟁에서 일어난 일들을 단 50일 동안의 사건을 통해 생생히 보여준다. 역병이 만연하던 9일, 올림포스의 신들이 아이티오페스족의 잔치에 가 있던 12일,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하던 12일, 헥토르의 화장을 위해 장작을 준비하던 9일을 빼면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기간은 단 며칠로 압축된다. 이렇게 �일리아스�가 다루는 이야기의 범위를 세세히 알게 되면 �일리아스� 읽기가 훨씬 수월하다.
직유와 인물 소개
�일리아스�에는 직유와 인물 소개가 자주 등장한다. 직유와 인물 소개는 자칫 지루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이때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가 안테미온의 아들인 꽃다운
젊은이 시모에이오스를 맞혔다. 이자는 일찍이 그의 어머니가
양친을 따라 작은 가축 떼를 구경하러 이데 산에 갔다가
거기서 돌아오는 길에 시모에이스 강둑에서 낳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시모에이오스라고 불렀다.”
(4권 473행 ~ 477행)
�일리아스�를 읽다보면 이러한 인물소개를 자주 접하게 된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헷갈리는데 그들의 가족까지 등장하는 모양새를 볼 때면 책을 덮고 싶다. 이럴 때는 영화를 떠올려 보자. 영화에서 한 인물이 죽음을 맞이할 때, 진행되던 장면이 멈추고 그의 출생과 삶의 이력을 보여주는 장면이 진행되다, 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바뀌는 모습을 자주 봤을 것이다. �일리아스�의 인물소개를 영화에 투영시켜 생각한다면, 이해가 더 쉽다.
“그(시모에이오스)가 먼저 앞으로 나오는 순간 아이아스가 그의 오른쪽 가슴 위
젖꼭지 옆을 맞혔다. 그래서 청동 창이 그의 어깨를 뚫고 나가자
큰 늪의 질척한 땅에서 자란 미끈한 포플러나무처럼
그는 땅 위 먼지 속에 쓰러졌다.”
(4권 480행 ~ 483행)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이와 같은 직유로 풀어낸 작품이 얼마나 될까. 미끈한 포플러나무를 통해 시모에이오스가 죽기에는 너무 미끈한(젊은) 생명임을 감각적으로 그려냈다.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얽힌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복잡하다. 그럴 때는 인물을 표현하는 직유의 묘미에 집중하자.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트로이아 전쟁의 신들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신들은 사소한 이해관계 때문에 편을 갈라 인간사에 개입한다. 서로 속이고 싸우며 때로는 다치기도 한다. 트로이아의 편에선 신들은 제우스, 아폴론, 아프로디테, 아레스다. 제우스는 최대한 중립을 취하지만 트로이아에 더 자주 등장한다. 아폴론도 마찬가지다. 아프로디테는 당연히 트로이아의 편이다. 트로이아 왕자 파리스에게 최고의 미인으로 인정받아서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의 연인이기에 트로이아 편이다.
헤라, 아테네, 포세이돈은 희랍 연합군 편에 선다. 헤라와 아테네는 아프로디테의 미모에 밀려 파리스의 인정을 못 받았다. 이렇게 보면 트로이아 전쟁에 함께한 신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신이다. 그들의 참전 명분은 아름다움, 사랑과 같이 지극히 감정적인 대상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이성의 유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일까? 이성이라고 하면 철학이 떠오른다. 철학이야말로 이성의 꽃일 것이다. �일리아스�와 마찬가지로 철학의 주요 무대 역시 희랍이다. 실외 생활하기 좋은 희랍의 기후인지라 희랍 사람들은 스토아(회랑)의 그늘에 모여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토론의 뿌리,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고 철학에도 영향을 줬다. 스토아학파도 스토아에 모여 이야기 나눈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때로는 감정이 상하고 심하면 말싸움으로 번진다.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이성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즉, 논리가 생겨난 것 아닐까? �일리아스�의 신들도 감정적인데, 인간이 이성적으로 살 수 있을까? �일리아스�에서는 위대한 신일수록 그 본래의 기능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개성과 감정을 보여준다. 인간은 본래 감정적으로 사는 존재이며, 이성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라 생각한다.
아킬레우스보다 잔인한 오늘, 프리아모스보다 통탄한 부모들
“위대한 프리아모스는 그들 몰래 안으로 들어가서는 가까이
다가가 두 손으로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자기 아들들을
수없이 죽인, 남자를 죽이는 그 무시무시한 두 손에 입 맞추었다.”
(24권 477행 ~ 479행)
“아킬레우스여! 신을 두려워하고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나를 동정하시오. 나는 그분보다 더 동정 받아 마땅하오.
나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차마 못한 짓을 하고 있지 않소!
내 자식들을 죽인 사람의 손에 얼굴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오.”
(24권 503행 ~ 506행)
헥토르의 시신을 찾으러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아간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의 손에 입을 맞추고,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 달라 탄원한다. 부모가 아니고서야 원수에게 사정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프리아모스보다 더 원통한 부모들이 눕지도, 앉지도, 서지도 못한다. 프리아모스는 비록 12일이 걸렸으나 영면에 든 아들 헥토르를 만날 수 있었다. 세월호 참사와 제주항공기 참사의 부모들은 자식의 주검조차 더듬지 못한다. 아킬레우스보다 잔인한 오늘이다.
�일리아스�의 배경이 된 기원전 1500~1200년이 야만인가? 오늘이 야만인가? 생활양식의 발전이 문명의 발전은 아니다. 우리는 12일간 헥토르의 시신을 능멸한 아킬레우스보다 잔인한 오늘을 산다. 프리아모스보다 통탄한 부모들과 호흡하고 있다. �일리아스�는 끝나지 않았다.
�일리아스�는 오늘을 바로 보게 한다.
바로 보기 시작할 때, 조금씩 야만을 던져낼 수 있다.
기억하자! �일리아스� �20140416� �20241229� 그리고 �2022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