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Tasty G 고전 칼럼 3>
의심 실천 그리고 지식
-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철학은 생각에 불을 지핀다. 잠자는 생각을 불러내어 생각에 취하게 한다. 철학은 정의하기 어렵다. ‘00하는 행위’를 철학적이라 말할 뿐이다. ‘의심’에서 출발해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이 철학이다.
소크라테스는 의심과 실천의 페르소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소크라테스의 의심과 실천의 삶을 그린 고전으로 그가 멜레토스에 의해 기소되어 법정에서 자신을 변론하는 일화를 담고 있다.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잘 안다.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 익숙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제대로 알까?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은 델포이에 위치한 아폴론 신전의 벽에 새겨진 문구다. 영화 매트릭스 1편에서 주인공 네오가 예언을 듣기 위해 찾아간 오라클(예언자)의 집에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보통 “분수를 알아라.”로 해석하는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너 자신을 알라.”의 본래 의미는 “네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라.”이다.
어중간하면 문제다.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지 모르고, 빨간 띠의 발차기는 설익었다. 어중간한 공부는 위험하다!
어중간히 공부한 사람은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얕은 지식을 가지고 급하고 쉽게 판단하며 옳다고 착각한다. 편견에 휩싸여 대화 할 줄 모르고 입만 열면 지식을 자랑한다.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에 화내고, 말을 자르며, 가르치려 든다. 진심어린 조언에는 깐죽댄다.
제대로 공부한 이들은 겸손하다. 공부를 할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것을 안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며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다. ‘틀림’과 ‘다름’을 구분 할 줄 알며, 지식을 자랑하지 않는다. 귀감이 되며, 자연스레 타인의 삶을 울린다.
아폴론은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다.”라고 선언했다. 소크라테스는 제대로 공부했다. “인간의 능력 내에서 내(소크라테스)가 아는 유일한 한 가지는 바로 내가 무얼 모르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무지無知의 지知가 있었기에 아폴론의 선택을 받았다.
“악법도 법이다.” 역시 소크라테스의 소유가 아니다. 이 말은 1930년대 일본의 법 철학자 오다카 도모오의 글이 오독 된 데서 비롯한다. 그가 자신의 저서 <법철학>에서 실정법주의를 내세우며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도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라면서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 한다.”고 했던 것이, 마치 소크라테스가 직접 한 말처럼 알려진 것이다.
2004년 11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들었다는 교과서 내용은 준법사례로 적절치 않다며 수정을 권고했다. 역대 권위주의 정권이 법집행의 정당화에 “악법도 법이다.”를 악용했으니, 소크라테스는 억울하다.
소크라테스는 아폴론에게 임무를 받는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모르는 이들(시인, 기술자, 정치인, 웅변가, 소피스트)에게 질문을 던져, 무지無知를 깨닫게 해주는 임무였다. 이 임무는 그가 멜레토스[시인]에 의해 기소된 이유이기도 하다.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현혹해 타락시킨다는 명목으로 소크라테스를 고발한다. 하지만 멜레토스로 대표되는 당대의 지식인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들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소크라테스에게 자신들의 무지를 들킬까봐 고발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위정자들의 화풀이 수단이었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이었다. 아테네의 장군 알키비아데스가 신성 모독 후 스파르타로 도망 쳐 아테네의 군사 정보를 스파르타에 제공해 아테네는 전쟁에서 패한다.
두 차례의 군사 정변과 스파르타에 대한 전쟁 배상금 지불 문제로 아테네의 위정자들은 곤란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치 비판을 일삼자 위정자들은 화풀이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운다. 소크라테스를 본보기 삼아 비판을 차단하겠다는 협박이다.
소피스트들도 소크라테스 고발에 한 몫 했다. 당시의 소피스트들은 주류 학계의 논변가이자 명문가 자제들의 고액 과외 선생이었다. ‘키케로의 인문학’도 이러한 과외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을 비판하자 그들의 명성에 금이 갔고 고액 과외에도 지장을 줬다. 소피스트들은 소크라테스를 증오했다. 진짜의 존재가 드러날수록, 가짜들은 위협을 느끼고 서로 결탁해 그를 배제하려는 분위기가 여전히 사회에 만연해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소크라테스는 판결 앞에 당당했다. 오히려 자신은 진리 앞에 떳떳하고, 앞으로도 아테네 지식인들의 무지를 깨우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사형을 받아들였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닙니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확신하게 하는 무지가 아닐까요?”
(17편)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의심’하고 의심을 통해 형성된 신념을 지키려는 ‘실천’의 힘이 있었기 죽음 앞에 당당했다. 또한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이란 저항이자 현실을 극복해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날갯짓이었다. “살아 있는 때는 모든 것이 병이며 죽음이야말로 유일한 치료제”라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통해 병을 치료하길 원했다.
소크라테스는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탈출도 벌금형도 거부했다. 벌금을 내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탈출 하면 위정자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법을 어기고 탈출을 할 만큼 나쁜 사람’이라는 명분을 제공하는 꼴이 된다.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사람들이 원한 것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아닌 벌금형이나 탈출이었기에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죽음을 보냈다.
“虛其心 實其腹(허기심 심기복)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워 그 배를 채우게 하고,
弱其志 强其骨(약기지 강기골) 그 뜻을 부드럽게 하여 그 뼈를 강하게 한다.
常使民無知無慾(상사민무지무욕)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앎이 없게 하고 욕심이 없게 한다.
使夫智者不敢爲也(사부지자불감위야)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爲無爲 則無不治(위무위 즉무불치) 함이 없음을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노자 <도덕경> 3장)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격언에 반하는 노자의 철학이다. 노자는 “항상 뜻을 세우는 사람들(엘리트)이 세상을 망치지만, 적어도 돼지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노자 역시 無知(무지)를 언급했다. 노자의 무지란 쓸데없는 知(지)를 없애는 것이다. <도덕경> 3장의 마지막 두 구절은 비판 없는 선비를 꾸짖는다. “선비는 희생의 철학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옮음을 외쳐야한다.”
소크라테스와 노자는 서로 닮았다.
진짜는 서양과 동양을 막론한다.
고전도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