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y G 고전 칼럼 4> 사랑하라

- 플라톤 <향연>

by Tasty G

<Tasty G 고전 칼럼 4>


사랑하라


- 플라톤 <향연>


국립국어원은 2012년 10월 ‘사랑’의 뜻풀이에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민원을 접수 후 이를 성중립적으로 수정했다. 하지만 기독교단체 등이 동성애를 옹호한다는 항의성 민원을 내자 이성(異性)애 중심으로 사랑의 뜻풀이를 바꿨다. 사랑이란 무한이다. 기독교단체의 처세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 반하는 행동이지 않을까.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성애와 동성애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향연>은 아가톤(비극 시인), 소크라테스, 아리스토데모스(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드로스(문필가), 파우사니아스(아가톤의 애인), 에리크시마코스(의사), 아리스토파네스(희극 시인), 알키비아데스(아테네 권력자)가 아가톤의 집에 모여 먹고 마시며 사랑에 관해 토론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리스 도기에 새겨진 최초의 인간 안드로구누스.jpg <그리스 도기에 새겨진 최초의 인간 안드로구누스>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은 본래 남성, 여성, 제 3의 성 이렇게 세 가지 성(性)을 가졌었다고 말한다. 제 3의 성은 남자와 여자 두 가지 성이 혼합된 모습으로 남녀동체(男女同體)라고 부른다. 아주 오랜 옛날 인간은 하나의 머리에 두 개의 얼굴, 두 쌍의 팔, 두 쌍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즉 등과 등이 붙은 한 쌍의 인간이었다. 남성과 남성이 붙은 인간은 해의 아이, 여성과 여성이 붙은 인간은 땅(지구)의 아이, 남성과 여성이 붙은 인간은 달의 아이라 칭하였다.


이들은 생김이 둥글둥글해 굴러다녔고, 힘이 아주 셌다. 이에 위협을 느낀 제우스와 신들은 의논한다. 모두 죽이자니 인간이 바치던 예배와 제물을 영원히 상실하게 되고, 그렇다고 인간들의 오만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제우스가 나서서 인간을 둘로 쪼갤 방안을 내놓는다. “나는 그들을 모두 둘로 쪼개놓겠소.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지금보다 약해지고 동시에 그 수가 늘어남으로써 우리들에게는 더욱 이익이 될 것이오. 그들은 두 발로 똑바로 서서 걷게 될 것이오.”

제우스에 의해 조각 난 인간들.jpg <제우스에 의해 조각 난 인간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제우스는 자신의 번개가위로 서로 붙어있던 인간을 두 조각으로 쪼갰다(인간의 등을 번개가위로 자른다). 제우스는 인간을 두 조각으로 쪼갠 후 얼굴과 목을 절단한 쪽(등 쪽)으로 돌려놓아서 인간들이 쪼개진 모습을 똑똑히 보고 앞으로는 온순하게 행동하도록 만들라고 아폴론에게 명령했다.


아폴론은 잘라진 인간의 몸을 꿰맸고 신에게 반항하지 만들라는 메시지를 상기시키려 배의 한가운데에 구멍을 남긴다. 이 구멍이 바로 배꼽이다. <향연>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의 몸이 잘렸기에 자연스럽게 잘려나간 자신의 반쪽을 그리워했고, 그리움으로 인해 사랑은 시작됐다.


<향연>은 이성애, 동성애와 같은 이분법이 아닌 본래 하나였던 인간이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 위한 여정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나는 기억해. 두 개로 갈라진 후 넌 나를 보고, 난 너를 봤어 널. 알 것 같은 그 모습 왜 기억할 수 없을까? 피 묻은 얼굴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하지만 난 알아 네 영혼, 끝없이 서있는 슬픔 그것은, 바로 나의 슬픔. 그건 고통 심장이 저려오는 애절한 고통 그건 사랑. 그래 우리 다시 한 몸이 되기 위해 서로 사랑해. 그건 Make it love, Make it love. 오랜 옛날 춥고 어두운 어느 밤 신들이 내린 잔인한 운명. 그건 슬픈 이야기. 반쪽 되어 외로워진 우리 The Origin of Love. That's Origin of Love."

<영화 헤드윅 OST The Origin of Love>


영화 <헤드윅>의 감독 존 카메론 미첼은 <향연>에 담긴 사랑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영상이다. 이토록 애절한 이야기 앞에서 이성애냐, 동성애냐 등의 구별짓기는 낭만 없는 허사다. 사랑은 과학, 논리, 이념, 종교로 분석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얻기 위한 행동, 다른 목적으로 했더라면 비난 받았을 행동에 관대할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찬양한다. 예를 들어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상사에게 아부하거나 애걸복걸하는 것은 비난 받는다. 하지만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아부나 애걸복걸도 수치스럽지 않다.


<향연>에서 파우사니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애인의 부나 권세를 보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애인이 겪게 되는 어려움 때문에 깜짝 놀라서 이를 견뎌내지 못하거나 또는 애인이 제공하는 물질적 정치적 이익에 저항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대상마저 소비력으로 가늠하는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곱씹어 볼 만한 대목이다. 사랑이란 서로의 자유 취향 개성을 존중해주고, 그것들이 잘 발현될 수 있도록 배려 할 때 결실을 맺는다.


부와 권세를 전제로 한 사랑은 치우친다. 치우친 순간 ‘나’는 없어진다. 나의 자유 취향 개성도 사라진다. 부와 권세는 달콤하며 누구나 욕심낸다. 부와 권세를 쫓는 것을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을 빌어 부와 권세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나’를 지우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애인의 지혜와 덕을 위해 기여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자신의 교육과 지식 일반의 증진을 위해 열성을 기울일 때, 그때에 즉 다른 어떤 경우도 안 되고 오직 이 두 원칙이 일치할 때에만 한 소년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명예로울 수 있습니다.”

(본문 중에서)


<향연>이 말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플라톤은 파우사니아스의 입을 빌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서로의 지혜 덕 지식의 증진을 위해 노력할 때만이 사랑은 명예롭다 말한다.


<향연> 그리고 당대의 아테네 철학자들은 남성들 간의 사랑을 좋은 사랑으로, 여성이 결부된 사랑을 나쁜 사랑으로 간주했다. 특히, 나이든 남성과 어린 소년의 사랑을 최고로 여겼다. 그럴 수 있지만, 그들의 여성 비하는 같은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에게 사과하고 싶을 만큼 괴팍하다.


필자는 남성으로서 기나긴 여성 차별의 역사에 대해 죄의식을 느껴왔다. 그리고 남성 우위의 사랑관, 이를테면 여러 여성을 사랑하는 남성은 능력자라 칭송하고, 여러 남성을 사랑하는 여성은 문란하다 질타하는 내로남불을 못 견딘다.


어머니께 얹혀살고 있다. 윤기 도는 따뜻한 밥과 건강한 반찬이 퇴근을 기다린다. 옷장에는 깨끗한 양말과 속옷이 담겨있다. 365일 먹고 입지만, 365일 줄어들지 않는다. 오병이어보다 기적이다. 장애를 겪고 계시는 어머니라, 챙겨주시는 마음에 면목 없고 아프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위대한들 부모의 사랑에 견줄 수 없었다. <향연>이 뛰어난들 부모의 사랑보다 위대할 수 없었다. 부모의 사랑은 세상 모든 것을 압도했다. 이렇듯 진정한 고전은 늘 우리 주위에 있었다.


딸에게 수면제를 탄 음료수를 먹인 뒤 살해한 친모가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아들에게 며느리와 손자가 보고 있는 앞에서 총을 쏴 숨지게 한 친부가 구속됐다. 진정한 고전이 사라지고 있기에 고전(향연)이라도 꽉 붙들어야 한다면 억측일까.


민생회복 소비쿠폰 덕에 사랑하기 조금 더 좋은 날이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부모든 자식이든 꽃이든 동물이든 책이든 음식이든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