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리를 먹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를 함께 먹고
새우리에서 정구지까지.
이 제목을 보고 단번에 뜻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다.
궁금을 넘어,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이 온라인 공간 어딘가에 ‘새우리’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달려가 덥석 손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내 고향 제주에서는 부추를 ‘새우리’라고 부른다. 80년대생인 내 또래에서 흔히 쓰는 단어는 아니었던 것 같고, 제주를 떠나온지 20년이 지났으니 요즘 세대는 또 어떨지 모르겠다. 다만, 엄마와 할머니가 새우리라고 말하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막상 나는 내 입으로 몇 번 발음한 적도 없는 ‘새우리’가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공선옥 소설가의 산문집 『행복한 만찬』을 읽고 나서였다. 유년 시절 전라도 시골에서 뛰어놀며 맛본 추억의 음식과 식재료에 얽힌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놓은 이 책에서, 작가는 부추를 이렇게 소개한다.
부추를 우린 ‘솔’이라 했다. 그 생긴 모양이 꼭 소나무의 솔잎 같아 솔이라 했을 것 같다. 도회지 사람들은 솔을 한사코 부추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대번에 또박또박 야물게도 가르쳐준다.
“아니어라우, 이것은 솔이어라우.”
우리 동네 가시내들은 참 똑똑도 했다. 아니어라우, 그것은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어라우. 머시기가 아니고 거시기어라우. 나중에야 솔을 부추라고도 하고 경상도 어디서는 정구지라고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김치도 도시에 와서야 알게 된 말이다. 우린 ‘짐치’ 혹은 그냥 ‘지’라고 했다. 그러니 부추김치도 우리에게는 그냥 ‘솔지’다. 배추지, 무시지, 싱건지, 솔지…….
_「솔 반찬 해서 누구랑 먹을꼬」, 공선옥 산문집 『행복한 만찬』 중에서
타지에 나와서야 부추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정구지라는 단어도 알게 되었다는 작가의 경험처럼, 나 역시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솔’을 배웠고 부산에 와서야 ‘정구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새삼 ‘새우리’가 애틋해졌다. 새우리를 새우리라 하는 사람을 만나 새우리를 먹으며 재잘재잘 떠들고 싶었다. 돼지국밥집에서 부추가 곁들여져 나오면 모두가 ‘정구지’라 할 때 혼자 속으로 ‘이건 새우린데...’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막상 제주에 있을 땐 소중한 줄도 몰랐던 그 말이 이제는 내가 나고 자란 섬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음식과 언어 속에는 많은 시간이 뒤엉켜 녹아 있다. 전라도 사람이 솔을 ‘솔’이라 부를 때, 경상도 사람이 정구지를 ‘정구지’라 부를 때, 그건 단지 ‘백합과에 속하는 다년생 채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향에서의 기억이 함께 호명되어 줄줄이 딸려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만이 갖는 고유한 정서가 된다.
이를테면, 공선옥 작가에게 ‘솔’은 곧 자연이다.
밤의 내밀한 소란스러움, 낮의 적막, 비, 바람, 달, 별빛들이 들려주는 소곤거림 같은 것들이 밭에서, 산에서, 들에서 나고 자란 것들을 키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솔을 먹으면 나는 찔레꽃 향기와 뻐꾸기 울음소리와 산밭의 어둠과 바람과 비와 달과 별의 소곤거림까지를 먹게 되는 것임을 촌아이들은 콩만 할 때부터 알게 되는 것이다.
_「솔 반찬 해서 누구랑 먹을꼬」, 공선옥 산문집 『행복한 만찬』 중에서
새우리밭에서 새우리 싹둑싹둑 잘라 본 적이 없기에, 나는 새우리를 먹으면서 찔레꽃 향기나 뻐꾸기 울음소리를 느끼지는 않는다. 내가 새우리를 떠올릴 때 들려오는 것은 내가 알던 여자들의 목소리다. “새우리 이시믄 다졍 넣으면 맛 좋주.”, “새우리 김치 담가시난 호끔 가졍 가라.” 하시던 엄마와 할머니의 말이, 푸릇한 이파리보다 먼저 떠올라 머릿속에 맴돈다. 어린 시절 내가 새우리를 먹을 때, 엄마와 할머니의 시간까지 함께 먹고 있었음을 이제는 안다.
어느덧 부산살이 12년 차, 부산 토박이 남자와의 신혼 생활 2년 차.
나는 요즘 ‘부추’나 ‘새우리’보다 ‘정구지’라는 단어를 더 자주 발음하면서 살아간다. 남편 입맛에 맞게 젓국 듬뿍 넣어 짭조름하게 정구지를 무치고, 비 오는 날이면 남편이 나를 위해 정구지 찌짐을 부쳐 막걸리와 함께 내놓는다.
‘정구지’와 함께 우리는 지금 무엇을 맛보고 있는 것일까, 어떤 향기와 소리를 삼키고 있는 것일까. 이 순간이 미래에 어떤 의미로 기억될까. 내 지난날의 새우리 위에 정구지의 기억이 살포시 포개어진다.
앞으로 내가 마주할 무수한 밥상 위에 ‘새우리’가 아닌 ‘정구지’가 함께 하는 날이 더 많을 거란 생각을 하면 어쩐지 조금 억울하고 가슴 한 켠이 쓸쓸해지기도 하지만.
“내가 나의 솔지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부지런히 나의 솔지를 증언하는 일”이라던 공선옥 작가의 말처럼 나도 그저 증언을 할 뿐이다.
나의 기억 속 ‘나의 새우리’가 있었던 풍경에 대하여, 나에게 새우리를 먹여주었던 고마운 존재들에 대하여, 그리고 새로 사귄 친구 같은 ‘우리의 정구지’에 대하여.
들어 올린 밥숟가락의 수만큼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는 언어의 지층이 나의 혀끝에, 나의 입가에 더 풍성한 기쁨을 가져다주리라 믿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증언을 계속 해나갈 것이다.
여러분이 증언하고 싶은 기억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