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그저 조금씩 채워갈 뿐이야.
월요일은 치즈케이크, 화요일은 티라미수, 수요일은 에클레어…….
날마다 바뀌는 디저트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매일 이곳을 찾는다. 액자 속 사진을 탐내는 남성, 동요 가사집이 갖고 싶은 청년, 여행 중에 하룻밤 소파를 빌리기 위해 찾아온 외국인. 그들은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 어떤 화폐 단위도 아닌 자신의 마음속 기준에 따라 가치를 따져볼 수 있는 곳, 이곳은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속 ‘두얼’의 물물교환 카페다.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던 두얼은 카페를 열기 위해 과감히 퇴사했다. 그러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의 연속이다. 카페 개업을 앞둔 시점에 꽃집 트럭과의 접촉 사고가 벌어지고, 차 수리비 대신 한 트럭 분량의 카라 더미를 받아 들게 된다. 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친구들에게 물물교환을 제안했지만, 카라 한 송이의 대가로 그들이 들고 온 것은 커피 원두나 설탕이 아니라 쓸모없는 잡동사니들뿐이다. 우아한 분위기의 카페를 꿈꾸었건만 지금 그녀에게 보이는 현실은 온갖 조잡한 소품들로 가득 찬 창고 같은 공간. 매일 공들여 만드는 수제 디저트마저 찾는 이가 없어 처치 곤란한 쓰레기 신세가 되어 버린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답게 전화위복의 기회 또한 찾아왔다. 두얼의 눈엔 잡동사니일 뿐이었던 물건이 다른 누군가의 눈엔 꼭 갖고 싶은 보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배웠던 동요 가사가 실려 있는 낡은 책자. 어린 아들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목마. 저마다의 사연이 담긴 각양각색의 물건들, 금전적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두얼의 카페는 따뜻한 공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매출 걱정을 한시름 덜게 될 무렵, 한 남자가 등장한다. 이곳이 물물교환 카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얼마 후 봉투 한 꾸러미를 들고 다시 나타난다. 봉투 안에 담긴 건 그가 전 세계를 돌며 모은 서른다섯 개의 비누다. 그는 이 비누들을 ‘무엇’과 교환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자신도 두얼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비누는 카페에 남겨지고, 남자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러 올 때마다 두얼에게 비누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준다.
두얼은 자연스레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각각의 비누에는 지구 곳곳의 지명이 새겨져 있다. 아직 여행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두얼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도시들. 마다가스카르, 마드리드, 레이캬비크, …. 그가 다녀간 날이면 두얼은 지구본을 갖다 놓고 각 도시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짚어 본다. 그리고 엽서 크기의 종이를 꺼내 각 비누마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나간다.
그렇게 서서히 둘은 가까워지고, 두얼이 그린 그림도 서른다섯 장이 되었다. 돌연 남자는 두얼에게 주장한다. 당신은 이미 나의 ‘이야기’를 소유하였으니, 그 대가로 나는 당신의 ‘그림’을 가져야겠다고.
서른다섯 개의 비누와 서른다섯 장의 그림을 모두 가져가버린 남자. 그 행동에 두얼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영화는 어느새 결말에 다다른다. 여행사 직원들이 그녀를 찾아와 카페를 관광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사업을 제안한다. 두얼 곁에서 일을 도왔던 여동생은 가게의 지분을 노리는 그들이 달갑지 않다. 하지만 두얼은 과감한 결심을 하고 그들에게 ‘물물교환’을 역으로 제안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카페 지분을 내놓는 대신,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서른다섯 개의 도시로 떠날 수 있는 비행기표다.
일생일대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두얼이 떠날 준비를 마쳤을 무렵, 남자로부터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남자는 고백한다. 자신은 바로 얼마 전 부기장이라는 직업을 그만두었으며, 이제는 두얼 곁에서 함께 커피를 만들고 싶노라고. 그가 꿈꿔왔던 건 ‘물건 대 물건’의 교환이 아닌 ‘마음 대 마음’의 교환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두얼은 남자와의 재회를 미뤄두고 여행을 떠난다. 카페로 온 남자는 두얼의 빈자리를 대신 채운다. 그녀가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는 이렇게 잔잔한 아름다움을 지닌 영화다. 청춘남녀의 러브라인조차 너무 잔잔한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그리고 어쩐지, 나는 이 심심한 결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삶 위에 새겨놓은 발자국에서 내게 익숙한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요리사가 꿈이었다. 중학생 시절, 잡지에서 오려낸 음식 사진과 레시피로 클리어 파일 한 권을 가득 채웠다. 조리과가 있는 실업계로 진학해 빨리 주방에 서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막상 고등학교에서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나니 마음이 달라졌다. 대학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대학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기대했던 만큼, 아니 기대 이상의 음식 세계를 경험했다. 내가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였다. 실력의 한계에 부딪혔다.
졸업할 무렵에는 대기업 사원이 되고 싶었고, 졸업하고 나니 칼 대신 펜을 쥔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이리저리 방황이 길어지는 동안 학자금대출 만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빚을 모두 갚기 위해 중소기업 사무직으로 근무한 지 몇 년. 나는 퇴사를 했고, 한 권의 책을 출간했고, 지금은 또 다른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음식 이야기를 붙들고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의 소신대로 걸어온 길이라고 자부하지만, 그 발자국을 돌아보는 일은 너무나 부끄럽다. 꼬불꼬불 먼 길을 돌아 아직도 제자리인 기분. 나 자신을 설명할 명확한 단어 하나 만들지 못해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기분. 그런 면에서 나는 두얼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자신만의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를 찾고 싶다는 바람을 안고 공항으로 향하던 그녀의 얼굴은 얼마나 반짝반짝 빛이 났던가.
나는 종종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다시 틀어보곤 한다. 그리고 두얼이 짜놓은 에클레어 반죽이 오븐에서 구워지는 동안 나지막이 깔리는 내레이션을 유심히 듣고 또 듣는다.
이건 에클레어예요.
보세요. 크기가 조금씩 다르죠?
똑같을 수가 없어요, 음식도 사람처럼 제각기 다르거든요.
에클레어는 슈(choux) 반죽으로 구운 프랑스 과자의 일종이다. 슈 반죽은 일반적인 과자 제법과 달리 익반죽을 해서 안에 수분을 품고 있다. 이걸 짤주머니로 짜서 오븐에 넣으면 증기의 힘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속이 텅 빈 형태로 구워진다.
같은 반죽이어도 형태에 따라 마무리 방법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진다. 동그랗고 자그맣게 구워 크림으로 속을 채우면 우리가 흔히 아는 ‘슈(※풀네임은 ‘슈 아 라 크렘’)’가 되고, 속을 채우지 않고 겉면에 우박설탕을 뿌려 구우면 바삭하게 씹히는 ‘슈케트’가 된다. 슈 속에 크림 대신 아이스크림을 채우고 따뜻한 초콜릿 소스를 듬뿍 뿌린 건 ‘프로피테롤’, 큰 슈 위에 작은 슈를 얹어 눈사람처럼 만든 건 ‘를리즈외즈’, 자전거 바퀴처럼 커다란 링 모양으로 구운 건 ‘파리 브레스트’다.
‘에클레어’는 손가락 길이 정도로 길쭉하게 쭉 뻗은 모양이다. 겉면에는 폰당이나 초콜릿 글레이즈를 얇게 씌워 반짝이는 광택을 낸다. 그 반짝임 때문에 ‘번개’라는 뜻의 에클레어가 되었다. 기본 형태 외에도 일본과 프랑스의 유명 디저트 매장에서는 쇼케이스 속 보석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색감의 에클레어를 진열해 팔기도 한다. 겉모양뿐만 아니라 속을 채운 크림의 풍미도 다채롭다.
우리 모두는 철판 위에 줄줄이 짜놓은 에클레어 반죽 같다. 언뜻 보기에 비슷한 듯 보여도, 조금씩 길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부풀어, 각기 다른 맛으로 속을 채운다.
영화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는 줄곧 개성과 다양성을 강조한다. 그 의도는 편집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영화의 초반, 카라 한 무더기를 처치하려다 되레 산더미 같은 잡동사니를 떠안게 되어 난감해진 상황에서 영화는 불쑥 질문을 던진다.
“카라와 돈. 당신이라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그저 한 명의 관객으로서 스크린 밖에 머물러있던 나를 영화 속으로 초대하는 셈이다.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고 길거리 인터뷰 형식의 장면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카라? 아니면 돈?’
‘공부? 아니면 세계여행?’
이런 식의 질문들은 영화에서 꾸준히 반복된다. 두얼이 공항으로 이동하는 동안 던져지는 마지막 질문은 좀 더 묵직하다.
“당신 마음속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슴 뻐근해지는 답들이 화면 속에 쏟아진다.
영화는 당신의 답변을 기다린다. 관객 한 명의 생각, 관객의 한 명의 답변이 더해질 때라야 비로소 이 한 편의 영화는 완성된다.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를 처음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우연히 동네에서 대학 후배를 마주친 적이 있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후배는 중국에서 일을 하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다고 했다. 나의 안부를 물어왔지만 딱히 근황이랄 게 없어 당황스러웠다. 나 자신이 텅 비어버린 기분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느꼈다. 번호를 교환하고 돌아서는 길, 반가움보다는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 순간, 두얼의 대사가 떠올랐다.
물건을 교환하는 건 많은 이야기를 듣는 거야.
언젠가 내 이야기도 들려줄 날이 오면 좋겠네.
두얼은 카페 안에서 이루어지는 물물교환을 통해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물건 속에 담긴 누군가의 시간, 누군가의 감정, 누군가의 추억들을.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생각과 삶의 방식들이 존재하는지도 자연스레 깨달았다. 나는 그 과정에서 그녀가 느낀 감정이 ‘공허함’일 거라 짐작했었다. 회사 밖을, 카페 밖을, 대만 밖을 나가보지 못한 이가 느낄 법한 경험의 부재, 혹은 가능성의 부재 같은 것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그녀는 자신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확신 때문에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두얼은 자신이 무언가로 채워질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사람이었다. 아직 텅 비어 있기에 채워질 가능성 또한 무한함을 알고 있었다. 자신만의 경험, 자신만의 이야기로 속을 꽉 채우기 위해 걷는 나날들 위에서 그녀는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슈 반죽 얘기를 잠깐 더 해야겠다.
학교에서 요리를 배우던 시절, 나는 슈를 잘 굽지 못하는 아이였다. 이제 다 구워졌겠지 싶어 성급히 오븐 문을 연 순간, 부풀어 오르던 반죽은 다시 푸쉬쉬 꺼지며 가라앉고 말았다. 이 상태를 우리는 ‘주저앉았다’고 표현하곤 했다. 슈 반죽을 잘 굽기 위해선 충분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제대로 부풀지 못하고 주저앉은 슈에는 아무런 속도 채울 수가 없다.
꿈을 향한 여정도 그렇지 않을까. 초조함과 성급함이 앞서면 주저앉기 십상인 이 길.
‘나는 에클레어다, 나는 에클레어다’ 주문을 외우면서, 스스로를 믿어주고 기다려 주면 어떨까.
천천히, 비워지는 과정과 채워지는 과정 자체를 즐겨 보면 어떨까.
방황과 도전, 실패, 그리고 또 다른 도전을 반복하는 두얼과 나. 우리는 모두 에클레어다.
에클레어라고 부르기엔 아직 부족한 미완의 에클레어.
가장 나다운 색으로, 가장 나다운 향으로 속을 채우고 싶어 하는.
그리하여 언젠가 나만이 낼 수 있는 특별한 맛으로 속을 꽉 채우고야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