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utFLUID의 시선: 나누는 '선'이 아닌, 겹쳐진 '면'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과거의 점들을 되짚어보는 습관이 있다. 범인만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건 자연스럽게 수많은 흔적을 남긴다. 의식을 해서 기억하는 것과 무심코 지나친 것들로 나뉠 뿐이다. 헨젤과 그레텔이 의도적으로 흘린 과자 부스러기와 달리, 살다 보면 무심코 흘린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흔적들이 있고 나는 그것들을 추적하다 보면 그곳에 근원적인 '내'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01/ 궤도 밖의 이방인
과거를 복기해 보면, 나는 항상 ‘경계(Border)’에 서 있었다. 방랑자처럼 경계를 걸었고, 그 경계에서 여러 방향을 바라봤다. 그 경계는 ‘선’이 아니라, 나에게 ‘면’이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서있었던 경계의 면들은 나의 시야를 넓혀주는 소중한 거름이었다.
태어나서 "요이땅!" 하는 순간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레이스 위에 올라탄다. 정답이라고 여겨지는 길을 따라 전력 질주해야 하는 사회. 나는 그 레이스에서 어느 순간 묘하게 튕겨져 나온 느낌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내가 그 레이스에서 완전히 이탈하지 못했던 건, 소위 '안전핀'이라 불리는 성적 때문이었다. 경쟁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학구열이 치열한 동네에서 나름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목표라고 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스스로 원한 적 없는, 사회가 안전하다고 믿는 길을 따랐던 막연한 돌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나를 붙잡는 존재였다.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없었던, 혹은 뛰어내릴 명확한 지점을 찾지 못했던 나는 결국 디자인 또는 예술처럼 ‘창작’을 하고 싶은 마음을 붙잡지 못하고 흐름에 떠밀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그 이후 대학 입학 순간부터 군대 가기 전까지의 2년은 철저한 ‘정신적 방랑기'였다. 소속되어 있지만 소속감은 느낄 수 없었고, "내가 왜 여기에 있지?"라는 물음표만이 나를 가득 채웠다.
02/ 흔적 줍기
나는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내가 걸어온 길을 복기하듯 되짚으며 흔적들을 줍기 시작했다. 내가 현재 나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다면, 답은 이미 일어났던 과거의 순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던 순간들은 언제였지?’
그래, 유치원 때 내가 엄마와 나눈 대화를 기록했던 나의 ‘마주이야기’ 노트. 원장님이 그 노트를 들고 다니시면서 강연을 하셨고, 책에도 실어주셨다. 내 ‘마주이야기’가 재밌어서 밤을 새우고 읽으셨다고 했다. 그 노트가 아니었으면 낯가리고 쑥스러워하는 내가 그렇게 재밌는 아이인지 몰랐을 거라며.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나의 일기장이 학교 대표로 ‘사랑의 일기’ 상을 받아 새 일기장을 한가득 받기도 했다. 그래,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했고 또 잘했나 보다. 중고등학교 때도 독후감을 쓰거나 백일장에서 시를 쓰면 갑자기 불려 나가 상을 받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또 뭘 좋아했더라?’
맞다, 쇼핑을 빼면 내 인생 재미의 3분의 1은 삭제될 거다. 항상 뭔가를 사고 싶어 했고, 샀고, 차곡차곡 모았었다. 쑥스럽다고 전화로 치킨 주문하는 것도 싫어하던 내가, 중간고사 와중에 전화를 걸어 품절된 패딩이 입고되었는지 묻기도 했지. 어떨 때는 부모님 몰래 친구 집으로 배송시키고 받아오기도 했다.
나는 항상 사복 입는 날을 기다렸다. 교복만 입다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보여줄 수 있는 날이니까. 견학을 가는 날이거나 토요일 보충 수업이 있는 날이면 뭘 입을지 고민하고 스타일링을 상상했다.
내가 사복을 입고 가면 왠지 모르겠지만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를 범생이처럼 봤는데 뭔가 반전이라고 생각한 걸까? 난 내심 그런 반응을 즐겼던 것 같다. "그건 어디서 살 수 있어?"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든 여자든, 친구든 선생님이든 말이다. 심지어 컨설팅을 해주셨던 선생님이 마지막에 써 준 편지에도 옷을 잘 입는다는 칭찬이 적혀 있었다.
‘더 없나?’
그래, 나는 항상 교과서의 어딘가, 문제집 어딘가 빈 공간이 있으면 무조건 즉흥적인 그림을 채워 넣었다. 고등학교 때 어느 이동수업 날, 내가 책상에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다른 반 미술 입시 준비생이 독특하고 멋지다며 사진을 찍어갔던 기억이 난다.
같은 반 친구 한 명은 내 그림 스타일이 좋다며 자신의 세계사 교과서 표지를 나에게 할당해 주고 그림을 부탁하기도 했다. 나는 세계사에 걸맞게 세계 지도를 나만의 스타일로 채웠다.
찰나의 생각만으로도 나는 두 가지 의미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아무래도 ‘쇼핑’은 내세우기보다는 감춰야 하는 취미에 가깝다고 느꼈으니까.
내부에서는 나의 과거의 흔적을 추적하는 시간이었다면, 외부적으로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전까지의 독서는 주로 필독서를 따랐다면, 그때부터는 내가 끌리는 책만을 보았다.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은 나보다 앞서 그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의 궤적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가장 값싸고 안전한 방법이랄까? 그 시간은 누군가로부터 어떤 ‘정의’를 배우기보다는, 혼자서 ‘예술’이 무엇인지, ‘디자인’이 무엇인지, ‘창작’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03/ 방 안에서 펼쳐진 나만의 탐구생활
그때부터 나의 이중생활은 시작되었다. 학교에서는 컴퓨터 공학을 어거지로 공부했으며, 수업이 끝나면 냉큼 내 방으로 돌아와 매일매일 나만의 낚시를 시작했다. 아이디어를 끌어올리고 기록했으며, 즉흥적인 그림을 그렸고, 직접 손으로 표현하기 힘든 것은 포토샵으로 만들었고, 패션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부터 포스터 디자인, 광고 디자인까지 내 관심을 끄는 것들은 모두 나의 타깃이 되었다. 나의 ‘감감무소식’ 시기는 내가 가장 나 스스로 ‘살아있다’고 느낀 날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처럼 꿈을 꾸는 사람들이 궁금해서였는지, ‘프로젝트 런웨이’나 ‘도전 슈퍼 모델 코리아’, 그리고 이외의 예술 관련 오디션 방송들을 탐닉(?)했다. 그렇게 무언가를 표현하고 창작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그렇지만 나는 내 방 안에서 나의 길을 찾는 조준점을 찾고 있었다.
04/ 고삐 풀린 창작욕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이니 나의 창작욕은 점점 방 밖으로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쑥스럽기 어려운 온라인에서 나는 더 당당했다. 뭔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잃을 게 없으면 당당해지는 그런 느낌이었으려나? 가리지 않고 각종 공모전에 응모를 했다. 뭔가를 바랐다기보다는 나한테 스스로 과제를 부여하는 느낌이랄까? 방구석의 한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것들에서 낙방을 했다.
그래도 ‘파카 만년필 수필 공모전’에서는 상을 받았다. 노래도 이별을 한 사람이 부르면 다르다고, 여름 방학 때 고작 두 달 남짓 다녀온 미국에서 나도 모르게 딸려온 ‘미국병’이 큰 도움이 되었다. 여행이 주제였고 나는 ‘시간 여행’이란 제목으로 지금은 사라진 청담 프리마 호텔에서 상을 받았었다. 조금씩 난 방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 기획을 시각화해 준 건 그 당시 베타 테스트로 운영되었던 ‘LOOKLET'이라는 사이트였다. 전 세계 실제 브랜드 의상과 소품들, 그리고 실제 모델들을 3D로 구현하여 유저들이 스타일링을 할 수 있는 플랫폼이었는데, 단순한 옷 입히기 게임이 아니었다. 레이어링까지 가능했으며,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지, 코트를 어깨에 반만 걸칠지, 소매를 걷을지 말지, 그리고 모델의 표정이나 포즈, 배경까지 설정할 수 있는 퀄리티가 굉장히 높은 플랫폼이었다.
손으로 그리는 것에 한계가 있었던 나에게는 엄청난 메리트였고, 학교 수업도 잊은 채 그곳에 빠져 살았다. 내가 상상한 이미지를 모니터 위에 구현해 내는 희열. 그리고 그렇게 나의 색깔을 펼치던 어느 날 LOOKLET 매거진 측으로부터 내가 스타일링한 것이 마음에 든다면서 뮤지컬 시카고를 콘셉트로 6개의 착장을 만들어서 보내달라고 메일이 왔다.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랑 영어로 대화를 나눈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 착장을 온라인 매거진에 실어 주었다. 나는 그렇게 ‘무언가를 창작’하는 그 행위 자체에 온전히 몰두해 있었다.
나의 취향을 시각화하는 것에 익숙해질 무렵, 나는 내 시선이 타인의 니즈를 해결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그것이 내 전략가적인 기질의 첫 발현이었을까? 뭔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대한 나의 긴 탐구와 ‘쇼핑 데이터’는, 어느새 시장의 흐름과 대중의 니즈를 읽어내는 ‘기획자의 시선’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나의 타깃이 된 것은 내가 7살 때부터 팬이었던 S.E.S.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유진을 위해 팬카페에 올린 제안서였다. 당시 19살 남짓했던 나는 마치 엔터테인먼트사 기획 팀장이 된 것처럼 구체적인 분석 리포트를 작성해 팬카페에 올렸다.
[제안: 유진의 스타일 변화기 - 리얼리티 프로그램 기획안]
문제 정의 (Problem): 대중은 유진에게 '요정' 이미지를 기대하나, 본인의 털털한 성격과 스타일링이 그 기대와 충돌함. 제2의 도약을 막고, 드라마 캐스팅의 한계로 작용.
솔루션 (Solution): <서인영의 카이스트>와 같은 성장형 리얼리티 쇼 론칭.
실행 전략 (Action Plan):
1. 전문가 매칭: 당시 핫하고 친분 있어 보이는 하상백 디자이너와의 협업.
2. 캐릭터 구축: 워스트 드레서의 오명을 벗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을 진정성 있게 노출.
3. 케미스트리: 절친 바다, 슈, 야채파 멤버들을 게스트로 섭외해 자연스러운 일상 공개.
놀랍게도 이 당돌한 제안에 골수팬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고, 마케팅을 전공하는 또 다른 팬은 정식 제안서로 다듬어주겠다는 연락까지 왔다. 비록 그 프로그램이 실제로 제작되진 않았지만, 훗날 유진이 <겟잇뷰티> MC로 활약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나의 분석이 나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다의 경우에는 그 당시 같이 작업하고 계시던 DJ 프로듀서님의 연락처를 찾아내어, 콘셉트를 짜는데 도움이 될 만한 무드보드와 함께, 어울릴만한 패션-소품 브랜드들을 전달했다. 프로듀서님은 나의 순수한 열정을 나쁘게 보지 않으셨는지 꾸준히 연락을 받아주셨고, 나중에는 뮤직비디오 제안서도 보내기 시작했다. 결국 그 분과 작업한 곡들이 발매되지는 않으면서 나는 나의 아이디어들이 일말의 반영이 되었었는지 아닌지는 영원히 확인할 수 없었다.
군대에서는 불후의 명곡 무대를 위한 ‘도시 속의 정글’ 이란 콘셉트, 무대 디자인, 스타일링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매니저님께 전달하기도 했다. 나의 뻔뻔한 열정이 순수해 보였었는지, 매니저님을 통해서 휴가 중에 불후의 명곡 무대를 방청가기도 했다.
05/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시간들
군대를 가기 전 2년이란 시간이 제어되지 않는 나의 창작욕을 닥치는 대로 풀어내는 시기였다면, 나는 서서히 제대로 된 ‘예술’ 그리고 ‘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공군에서 24개월을 보내는 동안, 꾸준히 예술과 디자인 관련 서적들을 읽어나갔으며, 이번에는 방 안이 아닌 사무실에서 나는 꿈을 키워갔다. 뭔가를 그릴 수 있는 모든 것들 (A4 용지, 파일, 테니스공 등)에 그림을 그렸으며, 아이디어를 기록했으며, 또 유학을 꿈꾸며 학교에 대한 정보들을 모았다.
그 당시 나는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했다는(출처는 불분명하지만 내 인생을 바꾼) 문장을 되뇌곤 했다.
"이 세상에는 너만을 기다리는 ‘일’이 있다.”
일이라는 건 놀이도 아니고, 취미도 아니고, 내가 사회에서 맡는 역할을 의미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의 역할을 찾고 그 안에서 온전한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다.
제대 후 나는 망설임 없이 유학 포트폴리오 학원에 등록을 했고, 그 시절 작업들의 모태가 된 것은 내가 그동안 혼자 방 안에서, 군복무 중의 사무실에서 쌓아 온 스케치들과 즉흥적인 그림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항상 ‘원초적인 것’,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 ‘즉흥성’에 관심이 많았고, 선생님은 나를 ‘야생마’ 같다고 표현했다. 나의 재료들은 길거리에서 주운 판자, 나무 조각들, 박스들이었고, 애초에 재료나 도구에 대한 배경지식 그리고 편견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했다. 합격 후 유학을 떠난 학생들이 남기고 간 재료들은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들의 역할은 내가 뭔가를 덜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또 다른 경계에 서있었다. ’ 예술’과 ‘디자인’의 차이를 구분하고 어떤 길을 선택하냐였다. 일반적인 학교들은 ‘순수예술’과 ‘디자인’ 과로 나뉘고 그 특징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일반적인 ‘산업디자인’은 나랑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캐릭터를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순수예술’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좀 더 대중적으로 소통하고, 일상생활과 맞닿아있을 수 있는 상업적인 작업들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 나는 두 가지 옵션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나의 즉흥적인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발전시키는 것. 그 옵션은 한국에서 열렸던 포트폴리오 데이에서 만난 시카고 예술 대학(SAIC)의 입학 사정관들이 내 작업들을 좋아했고, 영어시험만 통과하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오퍼를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전부터 내가 제일 우선순위로 두던 네덜란드의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DAE)이었다. 내가 바라보는 일반적인 산업디자인이 아닌 예술과 디자인의 교집합 그 어딘가를 다루며, 디자이너의 고유한 캐릭터가 가미된 독특한 영역의 디자인을 풀어가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자인’이지만 실험적이었고, 그러면서도 개인의 캐릭터를 키울 수 있는 곳이었다.
결국 아인트호벤을 선택했고, 그 이유는 그 학교의 졸업생이었던 디자인 듀오 ‘포르마판타스마(Formafantasma)’의 작업이 그 당시 내가 생각하는 가장 궁극적인 밸런스의 작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분들에 대한 작업 소개뿐만 아니라 내가 해 온 작업들, 그리고 내 디자인에 큰 영향을 준 네덜란드 디자인이 가지는 특징들은 추후에 하나씩 소개할 예정이다.
그렇게 나는 네덜란드에서 4년 동안 디자인 공부를 했고, 현재 10년째 네덜란드에서 거주하며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06/ 다시, 출발선에 서다
10년 동안 디자인을 업으로 삼으면서 꽤 괜찮은 성과들을 쌓아갔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를 다시 ‘경계’로 밀어내는 듯한 관성이 항상 내 마음속에 있었다.
‘소비자로서의 나의 취향과 시선’
‘과연 나라면 구입할까?’ 첫 번째 글과 두 번째 글에서 보이듯이 나는 창작자이기 이전에 까다로운 소비자였다. 그리고 소비가 주는 행복을 아는 사람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배운 디자인은 분명 가치 있고 메시지 있는 작업들을 하는 데 있어서 내가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는 거대한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결핍은 ‘대중과 마켓’이었다. 단순히 상업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좀 더 삶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깨끗하고 하얀 공간에서 전시되는 예술이 아닌, 대중의 삶 속에 섞이는 디자인을 원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가 해 온 작업들은 명성 있는 갤러리나 뮤지엄에서도 전시되었고, 상도 받았으며, 해외의 여러 국가들에서 꾸준히 전시를 해왔지만, 그건 대중과 거리가 멀었다. 소수의 컬렉터들과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내가 그것을 바라보면, 나는 그 지점에 시선을 오래 둘 것 같지 않았다.
난 어느새 또 이곳에서 ‘안전핀’을 쥐고 있을지 놓아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남들이 말하는 정답을 향해 안전하게 흘러가는 것에 목표를 둘지, 내가 하고 싶은 그 정확한 지점을 찾아 나설지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다시 내가 과거에 흘린 흔적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찾은 나만의 정체성은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좋은 것을 선별하고(Collector) 그 가치를 글로 설명하며(Writer) 기획을 제안하는(Director) 통합적 플랫폼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애초부터 ‘경계’에 서있어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자로 잰 듯이 나뉘지 않고, 경계조차도 면이 되는 것이다. 내 안에는 창작자-수집가-기획자라는 세 가지 페르소나가 있고, 이것들이 겹쳐서 이루는 면에 나만이 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tautFLUID의 시선이 될 것이다.
[tautFLUID Soundscape] : Kanye West - Through The Wire
"가장 거칠 것 없이 치열했던 청춘의 시간들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