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표현 본능을 깨우고, 무형의 영감을 유형의 조각으로 치환하다
앞서 보물을 찾는 것과 취향을 말하던 내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무언가를 수집하고, 취향을 말하고, 기획을 하기 이전에 나는 ‘창작자’로서의 정체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아야 남을 안다는 말처럼 스스로의 심연을 깊게 탐색해 본 자만이 흔들리지 않는 고유한 잣대와 기준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목’, ‘관점’, 그리고 ‘취향’, 이 모든 것들은 옷을 갈아입고, 안경을 갈아 끼우듯이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무의식적으로 때로는 의식적으로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흡수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중요한 필터 역할을 한다. 그 필터는 내가 세상의 다른 보물들을 탐지하는 데에 있어서 확실한 기준치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해 온 작업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작업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가진 취향과 생각, 더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전달하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01/ 심연을 탐험하다
내 자아가 형성되던 20살 언저리, 내면에 잠자던 ‘원초적 표현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먼 곳. 그건 바로 우리 안의 ‘심연’이다.
일상에서 쉽게 꺼내지 않는 그 깊숙한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본능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심연’에는 보물이 될 만한 원석들이 무형의 형태로 파묻혀 있다.
이전 글에서 나는 ‘이 세상에는 너만을 기다리는 일이 있단다.’라는 말을 가슴 깊숙이 새겼다고 했다. ‘일’이라는 행위는 사회에서, 즉 나의 외부에서 행해지는 것이겠지만, 그 ‘일’에 대한 힌트는 내 안에서 찾아야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힌트를 건져 올리는 몫은 오직 ‘나’의 몫이었다.
성인이 되어 세상을 마주하며, 나는 본능적으로 자아를 보호해야 함을 느꼈다. 진짜 보호란 방어막 속에 나를 곱게 가두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자극 속에서 나를 잃지 않고 유연하게 소화해 내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즉, 나는 닿는 대로 모든 액체를 빨아들이는 스펀지가 아니라, 흡수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19년 남짓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내 손에 쥔 '영혼의 지도'는 분절적인 스케치에 불과했다. 길을 찾고 싶은 나에게 그것은 백지와 다를 바 없었다.
02/ 탐사 도구는 ‘즉흥’과 ‘반복’ 그리고 ‘즐거움’
모든 탐험에는 장비가 필요하다. 심연을 쫓는 여정인만큼 나침반, 물, 랜턴 같은 물질적 도구는 불필요했다. 내가 선택한 세 가지 도구는 ‘즉흥’과 ‘반복’, 그리고 이 둘을 관통하는 ‘즐거움’이었다.
첫째, ‘즉흥성’. 나에게 원초적이라는 건 가장 본질적인 것을 의미했고, 본질은 꾸며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몰입의 순간에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적 사고를 배제하고 ‘순간의 행위’에 집중하다 보면 내가 찾던 ‘무의식’에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나의 단단한 뿌리가 될 무형의 원석을 찾아 유형의 조각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둘째, ‘반복’. 나만의 패턴을 이어가는 루틴을 통해 가지를 키우고, 변주하듯 잎사귀를 피워 색을 입히는 일이다. 즉흥적인 행위에서 뼈대를 찾았다면, 반복을 통해 레이어를 쌓고 살을 붙였다. 나는 반복 속에서 내재된 공식이나 코드를 캐치했고, 익숙해진 공식의 미세한 변형을 통해 더 다양한 조각들을 모으며 나만의 영역을 증식시켰다.
셋째, ‘즐거움’. 이 모든 과정에 따사로운 햇살과 생동감을 입히는 일이다. 디테일 하나하나에 즐거움을 담는 것은 물질 이면의 영혼을 깨우는 행위다. 글이나 그림, 심지어 아이디어조차 그 과정에서 진정 즐겼는지, 아니면 의식과 욕심, 억지가 섞였는지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즐거움이 담긴 행위의 흔적은 미워하기 힘든 어린아이처럼 투박하지만 순수하고, 단순하지만 살아 숨 쉬는 특별한 지점에 놓여 있다.
03/ 벽화처럼 (Like a Mural)
나는 당시 ‘그리는 행위’ 자체를 동굴 벽화에 무언가를 새기던 것처럼 가장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행위라고 정의했다.
그 시절의 그림들을 복기해 보면 흥미로운 특징이 발견된다. 나는 언제나 왼쪽 어딘가에 얼굴 형상을 하나 그리고, 그 지점을 시작으로 즉흥적인 확장을 시작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는 익숙한 리듬을 따라 그림도 함께 뻗어 나갔다.
당시엔 의도하지 않았으나 지금 다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자연과 동물, 인간의 형상이 한데 섞여있다. 그리고 그들은 기묘한 패턴으로 엮이며 끊임없이 증식한다.
과거 원시 예술 속 인간과 동물의 형상이 사냥의 성공과 자손 번식을 위한 ‘공감 주술(Sympathetic Magic)’이었다면, 나의 행위는 결이 달랐다.
그렇다면 현대에 살고 있는 나에게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04/ 생존이란 개념의 확장
콘크리트 빌딩과 디지털로 가득한 오늘날, 더 이상 포식자를 두려워하거나 사냥의 성공을 기원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습관적으로 오늘의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원시의 시대를 상상하곤 했다. 그것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안락한 평화 너머의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필수 감정을 마주하고 싶은 갈망이었다. 나는 드로잉을 통해 인간과 동물 형상, 자연의 요소를 섞고 배치하며 우리가 잊고 사는 ‘생존’이라는 개념을 무의식 속에서 마주했다.
나에게 생존의 개념은 의식주 해결에 그치지 않았다. 나를 표현하고 무언가를 그리는 행위, 그것이 내게는 ‘사냥’이었고 그 사냥의 대상은 세상에 남기는 ‘나의 흔적’이라는 보물이었다.
자연에서 마주한 것들을 나만의 코드로 그려내고 패턴으로 채워가는 과정.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와 내 안의 막연한 가능성을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오는 의식이었다.
‘살고 싶다’는 생존 본능의 동기부여는 삶의 목적을 찾는 순간 가능해진다. 내가 즉흥적으로, 반복적으로, 그리고 즐겁게 남긴 그림들은 결국 나의 ‘생존 본능’이자 ‘원초적 표현 본능’의 기록이었다.
05/ 미디엄의 확장
드로잉을 통해 몰입을 경험한 나는 미디엄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즉흥적인 선들을 2D에서 3D로 옮기며 평면에 부피감을 더하자 그 순간 생명력이 깃들었다.
군 시절 그렸던 캐릭터를 입체 조형으로 구현한 결과물에 나는 ‘장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내가 걸어갈 길목을 지켜주는, 가장 때 묻지 않은 창작력과 생명력을 담은 수호신이었다.
나는 깨끗하게 진열된 화방의 도구들을 영혼이 없다고 여겼다. 재료 자체가 품고 있는 고유한 ‘이야기’가 나의 즉흥성과 만날 때 진정한 생명력이 표현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혼합해 도구를 만들었듯, 나는 작업실 주변의 길거리에서 주운 나무 막대, 누군가 남기고 간 오일파스텔, 자투리 천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 그 위에 패턴을 입히는 과정을 통해 작업을 완성했다.
그리고 부활(Revive)이라는 이름의 작업 또한 모아둔 나무 막대에 즉흥적으로 패턴을 입히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다시 세우는 과정을 통해 구현되었다. 반복적으로 마음을 쌓아 올리는 행위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진 ‘생명력’을 표현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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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기기(Carving)와 찍어내기(Printing)
그리는 행위를 넘어 고무판이나 리놀륨판에 패턴을 조각하고, 그걸 찍어내는 과정이 이어졌다. 나는 그 결과물을 ‘부적(Talisman)’이라 정의했다.
진로의 궤도를 수정하고 거대한 사회를 마주하며 느꼈던 불안을 달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봉인되어 있던 창작욕을 스스로 컨트롤하기 위한 ‘심리적 앵커링(Anchoring)’ 도구였을 것이다. 거대한 변화 앞에서 나를 보호하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내가 그때 주목한 것은 닭뼈였다. ‘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 인간과 동물이 움직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뼈’는 삶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은 뼈밖에 없다는 점에서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그 지점에서 닭뼈의 형상으로 판을 만들고, 그 판에 즉흥적인 나의 패턴을 새기고, 그것을 다시 찍어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나만의 부적을 만들었다.
더 나아가 거대한 ‘산’을 삶과 죽음의 경계로 보았다. 산에서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태어나고 각자의 삶을 이어가지만,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산은 나에게 하나의 거대한 무덤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족들과 먹고 남은 닭뼈를 모아, 삶아내고, 말리고, 그 위에 나만의 패턴을 입히고 그것을 형상화된 산의 이면에 실로 매다는 과정을 통해 그 사유의 과정을 표현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은 그 당시 내가 가졌던 세계관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바로 이 작업이다. 지극히 사적인 나만의 즉흥적인 드로잉을 모티브로, 그것을 푸른 리놀륨판에 하나하나 조각칼로 새기고, 자르고, 그것을 다시 입체적으로 엮어내는 과정이었다. 계획보다는 즉흥적이었던 구조와 배치는 내가 생각하는 우주의 모습과 맞닿아 있었다. 가장 긴 시간을 쏟은 이 작업은 내가 드로잉으로 쫓던 궁극의 모습이자, 나를 정의하고 응원하던 진짜 ‘부적’이었다. 미친 듯이 또 새기고 새겨 넣던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미쳐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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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아 올리기(Layering)와 꼬기(Braiding)
버려진 침대에서 뜯어낸 나무 판으로 대를 세우고, 폴리우레탄 폼을 쌓고, 노끈을 땋는 반복적인 행위. 그 안에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그 반복적이고 즉흥적인 행위의 끝이 내가 걸어가고자 하는 길에 맞닿아있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나의 초심이 순수하게 묻어있는 작업이다.
06/ 샤머니즘의 재해석
나는 반복적으로 벽화를 그리듯 그림을 그리고, 패턴을 새기고, 구조를 쌓고 꼬았다. 그 모든 행위는 예술 이전에 자리한 샤머니즘적 행위와 닮아 있었다. 그 과정은 내 안의 불안을 잠재우는 의식이자, 창작에 대한 열정을 태우는 불쏘시개였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두려워하거나 극복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심연을 탐험하며 마주한 어둠과 불안을 잠재우고, 내 안의 에너지를 즉흥과 반복, 즐거움을 통해 표출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것에 귀 기울이는 일을 비이성적이라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을 찾고자 하는 그 순간, 생존 자체가 삶의 거대한 과제였던 시기에 우리가 갖고 있던 가장 원초적인 감정에 주목했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세상을 더 열린 감각으로 마주할 수 있는 필연적인 시작점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07/ 내가 건져 올린 조각들
심연을 탐험하며 얻은 보물들은 ‘유형의 조각’으로 남았으나, 내가 얻은 결실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아니었다.
나는 표현했고, 겁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행복하고 즐거웠다.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변주하는 동안 나는 스스로를 달래고 치유했으며, 열정에 불을 지폈다. 절을 올리거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쌓아 올린 그 작은 행위들은, 보이지 않는 신념을 넘어 내 꿈을 지탱하는 견고한 기둥이 되어주었다.
세상에 뿌리내릴 나의 원형을 찾고, 나만의 경계를 표현하며, 그 힘을 토대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가장 가까운 내면에서 가장 먼 심연까지 가보았던 그 순간들 덕분에, 나는 ‘진심’, ‘진정성’, ‘생존 욕구’, ‘표현욕구’, 그리고 ‘즐거움’이 주는 본질적인 가치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 과정의 경험들은 지금도 내 취향 필터의 가장 거대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tautFLUID Soundscape] : Aurora - Animal
"나의 창작은 안식처를 찾는 도피가 아니라, 세상에 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원초적 사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