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 생장 - 론세스바예스
순례길 첫날의 아침이 밝았다. 그토록 원하던 순례길의 오르는 날인데 마음속에서는 긴장과 설렘이 경쟁하듯이 휘몰아치고 있다.
긴장한 탓인지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아주 고질병이다. 유일하게 나의 배고픔을 이기는 긴장과 스트레스..
그래도 아예 못 먹는 것은 아니니 오늘은 준수하다. 굶주린 배로 피레네 산맥을 넘지 않기 위해 잘 넘어가는 음식 위주로 열심히 먹어본다.
배낭을 단단히 메고 우비도 잘 챙기고 심호흡도 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제 알베르게를 나선다.
문 앞까지 배웅을 나온 스텔라 아주머니. 전 날 산에 눈이 내렸으니 조심 또 조심하라는 당부의 말과 뜨거운 포옹으로 우리의 순례길을 응원해 주셨다.
5월의 눈이라니, 우리의 매일매일이 좋을 수 없는 것처럼 날씨도 그러할 테니 마음만은 활기차게 가져본다.
"이제 이 길 위에 당신과 나 둘 뿐입니다. 마주 보기도 하며 나란히 걷기도 하며 잘 걸어봅시다."
까미노 안내표지를 따라 길을 나서다 성당에 잠시 들렸다. 이 길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으나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무사히 순례길을 마칠 수 있기를 청하며 성모님 앞에 초 하나를 봉헌했다.
이제 가보자!
성당에서 나와 성벽을 지나 얼마 걷지 않아 돌 담벼락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도 가보았다.
아! 여기가 바로 거기다. 시세 언덕길과 발까를로스 루트가 나뉘는 시점!
전 날 날씨가 안 좋았던 탓에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비, 우박, 눈 할 것 없이 하늘에서 내릴 수 있는 것들이 모두 내려 중도에 다시 내려온 순례자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리 없는 우리 부부는 1번 길, 시세 언덕길로 향했다.
마음을 굳히고 왼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가파른 경사길이 나타났다. 아스팔트 길이였지만 갑자기 만난 경사길에 조금 당황했다. 잠시나마 발까를로스 길로 가야 하나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다행히 경사길은 짧은 구간이었고 덕분에 초반 워밍업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경사구간이 끝나고 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화롭고 고요했다.
길 옆에 펼쳐지는 그림 같은 풍경에 벌써 말을 잃었다. 파란 하늘이 아니어도 안개 낀 하늘이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꼬불꼬불 나있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보면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다른 하늘과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그림책을 넘겨보는 기분이다.
그런데 갑자기 반대편 하늘에서 무지개가 나타났다. 무지개다!! 무지개!!
어제 눈이 왔다는 스텔라 아주머니의 말에 내심 신경이 쓰였었는데 무지개를 만나게 되다니!!
틀림없이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벌써 이 길에 푹 빠져든 것 같다.
발걸음에 신이남이 붙어 걸음이 가볍다.
순례길이 체질인 것 같다며 조잘조잘 ~ 오늘은 날씨가 엄청 좋을 것 같다며 조잘조잘 ~
입이 방정이었는지 후두두두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서둘러 우비를 챙겨 입었다. 데카트론 제품, 바지도 신발도 가방도 우비도.....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바로 피레네의 변덕스러운 날씨인가 보다.
차가운 바람에 비까지 더해지니 점점 추워진다.
날이 더 험상궂어지면 안 되는데... 추워진 날씨 탓에 걸음을 재촉해본다.
Huntto 알베르게(약 5km 지점)를 지나 200m 정도 더 걸었을까 갑자기 까미노 안내 표시가 잘 포장된 도로에서 벗어나 좁은 산길을 가리킨다.
어제 내린 비와 지금 내리고 있는 비덕에 길이 상당히 질퍽거렸다.
그리 길지 않은 구간에 심한 경사가 아니었는데 나를 붙잡아 두려는 땅과 씨름을 하면서 걸어야 해서
조금 힘들었다. 그래도 등산 스틱을 마법봉 삼아 열심히 올라갔다.
(왼쪽 산길로 들어서지 않고 포장도로로 직진해도 산길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고생 끝엔 낙이 온다고 산길 구간이 끝나니 아름다운 피레네 풍경이 우리를 반겨준다.
손에 닿을 듯한 구름들과 푸르른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얼마 만에 보는 초록 빛깔의 풍경인가~
(3개월 넘게 아프리카 대륙 생활을 하고 왔더니 더 값지게 느껴지는 것 같다.)
풍경을 벗 삼아 잘 포장된 길을 걷다 보니 어렵지 않게 오리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리손 산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과거에 론세스바예스의 부속 수도원이었다고 한다. 아직 론세스바예스까지 갈길이 멀지만 오리손 이후에는 마땅히 쉬어갈 곳이 없다고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오리손 알베르게 카페는 오고 가는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앉을자리가 없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커피를 주문하는 사이에 자리가 났다. 하루 안에 피레네 산맥을 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되면 오리손 알베르게에서 하루 머물고 가도 된다. 다만 자리가 한정적이라 예약이 필수라고 한다. 따듯한 커피로 몸도 녹이고 어깨도 쉬어가고~ 엉덩이를 붙인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겁나남편이 땀이 다 식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기에 다시 배낭을 멘다.
카페를 나서기 전 잊지 않고 크리덴셜에 도장도 받고 방명록에 우리 흔적도 남겨본다.
다시 길 위에 올랐다.
오리손부터 시작되는 길은 잘 포장되어 있었고 평지나 다름없는 완만한 경사에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다만 바람이 많이 불어 쌀쌀했다.
몸이 추워질까 쉬지 않고 걷는다. 날이 따듯했다면 풍경 구경도 할 겸 중간중간 쉬어갔을 텐데 바람이 매섭다.
길 위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소 친구들~
"안녕! 너희는 집이 어디야? 안 추워? 언니는 갈길이 멀어서 먼저 갈게~~ 근데 너희 귀가 귀엽다!!~"
길 위에는 순례자들이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중간중간 안내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 주위로 작은 돌탑도 쌓아져 있다. 돌탑을 쌓은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까 잠시 생각에 빠지게 된다.
바람이 잦아들게 해 달라는 소원을 누군가 빌었을까 바람이 조금 누그러졌다.
바람이 잠잠해지니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순간순간 마주하는 아름다움이 수많은 순례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을 수 있게 하는 힘이자 이유인 것 같다.
종종 이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바람과 맞서며 얼마나 더 걸었을까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잠시 길에서 벗어나 그 앞에 섰다.
세찬 바람이 방해를 하지만 잠시 기도를 드린다. 피레네에서 만나는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이라니~
이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상은 '비아꼬레 성모자상'으로 불리며 오리손에서부터 약 4km 되는 지점쯤에 위치하고 있다. 날이 흐려 언덕에서 멀리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맑은 날에는 프랑스길의 시작점까지 보인다고 한다.
조금 지쳤던 몸과 마음이 기운을 얻는 것 같다. 그런데 눈치 없이 자꾸 배꼽시계가 요란을 부린다.
사실 아침 조금 먹은 이후로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바람도 세차게 불고 마땅히 앉을 곳도 없어서 점심식사를 미루고 있었는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앉을 곳도 없고 바람도 매섭지만 우비를 깔고 앉아보기로 한다.
준비해온 바게트 빵과 햄 그리고 치즈를 넣어 간단히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하.... 지만 앉은 지 오분도 채 안돼서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추워도 너무 춥다. 차라리 걸으며 먹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아 한 손에는 스틱을 한 손에는 샌드위치를 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날이 추운 탓에 빵은 돌덩어리처럼 굳어버렸지만 유일한 식량이기에 최선을 다해서 먹어본다.
간단히 점심(?)도 먹으며 걸음을 이어가니 또 다른 모습이 우리를 반겨준다.
바로 5월의 눈 덮인 산!! 피레네는 정말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눈 덮인 산 입구 쪽에 다다르니 작은 푸드트럭이 눈에 들어온다.
화이트보드에는 여러 나라의 언어로 이 곳이 프랑스에서 찍을 수 있는 마지막 도장이 있는 곳이라 알려준다.
우리도 크리덴셜에 프랑스 마지막 도장을 찍고 이제 스페인으로 향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 길 위에 다시 한번 잠시 멈춰 서게 된다. 티바울트 십자고상 앞에서 무사히 피레네 산맥을 넘을 수 있도록 잠시 기도를 드리고 걷고 또 걷는다.
오늘의 목적지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는지 슬슬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앗.. 그래도 10km나 남았네;;;;; 더 부지런히 가야겠다.
푸른 풀 밭 위로 소복이 자리 잡은 눈이 인상적이다. 쑥떡 위에 하얀 팥을 뿌려놓은 것 같기도 하고 하얀색 목화솜 꽃이 핀 것 같기도 하다. 다행기 날씨나 길이 나쁘지 않았다.
잠깐 우박이 내리기도 했지만 금방 그쳐 순례길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 길을 걷는 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눈 오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한 동안 이 순간을 즐겼다. 눈 오는 피레네의 아름다운 풍경
눈은 잠시 스쳐갔다. 눈이 잦아들고 산 정상을 고대하며 걸음을 옮긴다. 이정표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정상에 거의 다다랐음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짙은 안개와 세 찬 바람이 우리가 점점 높이 올라가고 있음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짙은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던 중 작은 쉼터를 만났다.
오리손 이후로 처음 만나는 쉼터다. 비슷한 마음의 순례자들과 쉼터 안에서 얼어붙었던 몸도 녹이고 어깨의 고단함도 내려놓는 호사를 누려본다. 꿀맛 같았던 휴식도 잠시 가야 할 곳이 있기에 삼삼오오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우리도 끝까지 힘 내보자~~~
쉼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레푀데르 언덕'에 도착했다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었다.
쉼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레푀데르 언덕'에 도착했다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었다. 레푀데르 언덕은 해발 1,429m으로 시세 언덕길의 정상 지점이다. 더불어 이제 더 이상 올라갈 일은 없다는 의미다.
신난다~~ 내려가자~
순례길에 오르기 전, 순례자 사무실에서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이 2가지가 있는데 산길이 하나이고 포장된 도로가 나머지라고 했다. 하지만 비가 왔을 경우에는 산길은 많이 미끄러워 위험할 수 있으니 포장된 길로 걸을 것을 추천해 주었다.
포장된 길은 산길보다 조금 돌아가는 코스이나 길이 잘 포장되어 있어 쉽고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나중에 이날 산길에서 미끄러지거나 발목을 접질려서 고생했다는 순례자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길이 좋지 않다면 무리하지 않고 조금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평지가 나오고 우측에 산 살바도르 소성당도 보인다. 이제 정말 다 온 것 같다.
짜~~잔 드디어 우리는 무사히 순례길 첫날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서로서로 너무 고생했다며 꼭 안아줬다. 기특하고 고마운 남편.
밀려오는 감동과 뭉클함은 잠시 미뤄두고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많은 순례자들로 알베르게 1층은 바글바글했다. 그들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그들의 길을 어땠을까?
잠시 생각에 빠질 틈도 없이 서둘러 자원봉사자분께 대기표를 받고 우리 차례를 기다렸다.
색색별로 다른 색의 목걸이를 주시고 목걸이 색에 불이 사무실 입구에 들어오면 차례로 들어가는 시스템이다.
한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우리 차례가 돌아왔고 다행히 지하가 아닌 3층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알베르게는 1층부터 3층까지인데 순례자가 많아 꽉 찰 경우에는 지하에 간이로 침대를 놔준다고 한다. 원래 잠자는 공간이 아니기에 많이 열악하다고 한다.)
요금은 1인당 12유로(1,2층은 좀 더 저렴하다고 한다.)였고 아침식사 쿠폰도 5유로에 판매한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3층을 공개합니다.
1층 침대로만 구성되어 있고 2인씩 구분되어있다. 각각 개인 사물함도 있어서 짐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추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1,2층은 2층 침대로 되어있다고 한다.
38일의 순례길 동안 수면 공간이 가장 좋았던 알베르게 중에 하나로 꼽힐 정도다~~
서둘러 짐을 풀고 샤워를 한 뒤 저녁을 먹으러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주방이 있어서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 있으며 샌드위치 등의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 먹을 수 있는 자판기도 있다.
우리는 요리할 기운도 없고 슈퍼도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생장에서 야심 차게 준비해온 우동을 먹기로 했다.
(알베르게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를 사 먹을 수도 있다.)
우동 한 그릇이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우동의 행복을 만끽하고 서둘러 세탁실로 향했다. 세탁기, 건조기, 탈수기 그리고 손빨래 시설도 갖추어있다.
세탁과 건조는 빨랫거리를 봉사자분께 드리고 돈(3.5유로)을 지불하면 되고 탈수기는 약간의 도네이션을 하고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열심히 손빨래를 하고 탈수기만 이용했다.
빨래를 널고 뭔가 이대로 잠자리에 들기는 아쉬워 동네 산책에 나섰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니 ㅋㅋ
알베르게 바로 옆에는 성당이 있었는데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음을 감사하며 잠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 두 마리는 옆에 호텔에서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 길이 며칠이나 더 남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시작하는 오늘 나의 25km에는 남편이 있었고 그의 25km에도 늘 내가 있었다.
남은 한 걸음 한걸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의 걸음에 그가 그의 걸음에 내가 있을 것이다.
오늘 하루 너무 애썼고 잘 걸어줘서 감사하다.
다가오는 내일도 남은 날들도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