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탐에서의 72시간이 끝났다.
하지만 72시간은 정말로 끝이 아니었다.
11월 30일 오전 8시 35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야간 비행으로 쌓인 여독이 있었지만 편하게 쉴 수 없었다.
그날은 기말고사와 과제 영상 제출 마감날이었다.
우선 집에 오자마자 빨래를 돌리고,
노트북을 켰다.
전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정리해 주신
족집게 시험 문제 풀이를 다시 보며 시험을 준비하고,
바탐에서 열심히 찍어온 브이로그를 편집했다.
72시간 동안 찍은 영상들을 보며 바탐을 다시 떠올렸다.
푸드코트의 사테, CGV의 리클라이너, 동물원의 앵무새,
그리고 하버 베이의 일몰까지..
포장해 온 피상고랭을 에어프라이어에 덥혀 먹으며
편집하는 내내 내 몸은 아직 바탐에 있는 것 같았다.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공부와 영상 준비를 열심히 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하는데, 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욕심이 잠시 스쳤다.
시험은 무사히 마쳤다.
알리샤 선생님은 시험 문제를 쉽게 내시는 편이라서
한참을 더블 체크를 하고도 이십분 만에 시험을 마쳤다.
브이로그도 완성했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그렇게 바탐은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과제로 제출한 영상은
접수가 완료되면 확인 메일이 온다고 했다.
그런데 채팅방에 '접수 확인 메일을 못 받았다'는 메시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 역시 접수 확인 메일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설마.. 접수가 안 된 건 아니겠지?'
그러던 어느 날.
인도네시아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어? 발표?'
대사관 초청? 결승전 진출??
'무조건 갈 수 있지!!'
하지만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인도네시아어로 발표를 할 수 있을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준비하면 할 수 있을 거야.'
발표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다행히 이전 결승전 진출자들의 준비/발표 후기들이 있어서
준비하는 과정이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선생님께 여쭤보니 브이로그 영상 외에 발표 시간은 2~3분.
프젠테이션을 준비해도 좋다고 하셨다.
가족들과 오는 분들도 계셨다고 해서, 동행자 둘은 엄마와 막내 이모를 모셨다.
"내가 결승 진출자로 뽑혀서 대사관에서 발표하는데, 인도네시아식 뷔페가 나온데!" 라며..
'인도네시아어 검증을 위해 바탐에서 보낸 72시간'이
브이로그의 주제.
발표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
'왜 이 영상을 찍었는지'가 명확해야 했다.
언어 공부를 위해 왜 '브이로그/여행'을 선택했는지,
인도네시아 도시 중에 왜 '바탐'으로 갔는지,
어떤 도시이고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가 이해되어야
내 영상을 좀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을 말하기엔 내 인도네시아 실력이 짧았기에
일단 먼저 한국어로 소개문을 적었다.
AI를 활용해 자연스러운 구어체로 번역했다.
배우지 않아서 입에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은 '좀 더 쉬운 단어'를 택했다.
그리고 장문을 현지인이 읽어주는 어플을 사용해서 발음을 녹음한 후,
쉐도우 리딩으로 며칠 동안 수백 번 반복해서 말하면서 외웠다.
잘 때도 들으면서 자고, 장문을 외우기 전에 먼저 익숙하게 만들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외국 라디오 듣는 것처럼 들었다.
틀렸을 때는 틀린 부분부터 이어서 하기보다 처음부터 다시 반복했다.
"Selamat siang. Nama saya Tiara dari BIPA 2E.
Terima kasih atas kesimpantan ini. .."
인도네시아어를 처음 배우던
연수생 시절에도 말하기 시험이 있어서
매주 2~3분 정도 분량의 긴 문장들을 외웠었는데,
연수가 끝난 지는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장문의 외국어를 소화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PPT를 준비해서 챕터별로 외우니까 좀 더 쉬웠다.
이전 발표 때는 질의응답도 있었다고 했는데,
선생님께 여쭤보니 나는 PPT까지 준비해서 질의응답은 안 할 것 같다고 하셨다.
가장 중요한 건 내 머릿속에 그 긴 장문들을 다 집어넣는 것이었다.
어려운 단어는 끝까지 나를 괴롭혔다.
인도네시아 여행 이후 급성 목감기도 걸려서 기침이 많이 나왔는데,
발표를 말로 해야 하니까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잘할 수 있을까?'
바탐에서 72시간을 버텼던 나를 떠올렸다.
이깟 발표쯤이야. 하지만 목소리는 나와야 할 텐데..
'할 수 있어.'
옷장을 열어 내일 입을 옷을 준비했다.
바탐에서 산 바틱 셔츠가 조용히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