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백가합전>과 일본 민족 형성, 재일한국인, 과로사
(2020년 12월 31일 작성한 글입니다.)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은 일본 공공방송 NHK가 매년 12월 31일 저녁시간부터 방송하는 음악 프로그램이다. 그 해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가수들이 출연한다. 10대들이 좋아하는 가수부터 80대가 좋아하는 가수까지 다 출연한다. 오늘은 제71 회다.
재일 한국인은 이날만 되면 다들 ‘구리다’ ‘도저히 못 봐주겠다’고 한다. 당연하다. 케이팝 기준에서 만족하기 어려운 음악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에 재일 한국인이 이 프로그램을 즐길 수 없는 이유는, 이 프로그램이 단순 음악 방송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연말 음악 프로그램과 전혀 다른 맥락이다.
<홍백가합전>은 한국 학교 운동회에서 청팀 백팀으로 나뉘어서 겨루고 온 가족이 응원하는 것처럼, 톱 가수들이 홍팀과 백팀으로 나뉘어서 그해 가장 인기 있던 노래를 하고, 전 국민이 시청한다. 조부모부터 손자 손녀까지 모여서 고타츠(짱구에 나오는 그 상)에 옹기종기 발 넣고, 뿌리채소 등을 조린 음식을 먹는다. 며느리는 친정부모님과 시부모님을 뵌다. 명절과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애초에 재일 한국인이라는 마이너리티(소수자)는 낄 수가 없는 것이다. 홍백가합전은 음악 방송 이전에 온 가족이 어울려 보기 위한 의례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과거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없던 열도 거주자들은, 이날 그들이 하나의 일본 민족임을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다른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표준어라는 공통된 언어를 통해 (공통된 미디어를 접하며) 단일한 민족성을 형성한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반면 재일 한국인에게는 홍백가합전이 연말 음악 방송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취향 맞는 가수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12월 31일 열도의 메이저리티들의 분위기를 마이너리티는 즐기기 어렵다.
(사진 출처 : NHK 11시 뉴스 갈무리)
사진 속 그녀는 타카하시 마츠리다. 홀어머니 아래 자라서 도쿄대를 졸업한 뒤 2015년 일본 광고업계 1위 덴츠에 입사했다가 그해 과로사(자살) 했다. 12월 31일 오늘 그녀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녀가 자살한 뒤 그녀의 어머니는 노동부로부터 그녀의 자살이 과로사임을 인정받아내고, 수차례의 기자회견을 열고, 책도 써내면서 과로사 문제를 공론화했다.
대기업 덴츠의 사장은 옷을 벗었다. 근데 그런다고 오늘 그녀의 딸 마츠리가 돌아올까. 오늘 그녀는 고타츠에 혼자 앉아서 딸이 좋아하던 음식을 먹을까. 홍백가합전을 볼까.
지난 12월 25일은 타카하시 마츠리가 목숨을 끊은 지 5년 되는 날이었다. 살아있었다면 만 29살.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날 그녀의 어머니가 SNS에 남긴 말이다.
(사진 출처 : 고 타카하시 마츠리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