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묵호 발한삼거리 상가 이야기
동해 묵호역 굴다리 방향에서 북쪽으로 500m쯤 가면 세 갈레 길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유명했던 발한삼거리다. 좌측 길은 농협, 사문재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안묵호, 어달리, 대진으로 가는 길이다. 그 사이에 골목길이 두 곳이 있다. 화려했던 시절, 이 일대는 유흥업소와 음식점으로 북적이며 잘 나가던 환락가였다. 충북관, 명월관, 수정관, 백화원 등 요정이 골목마다 은밀하게 구석구석에 숨어 밤을 밝혔다. 또, 해성갈비, 부산갈비, 신풍냉면, 서울회관, 동해회관, 화성갈비, 복순루, 영흥루 등 식당은 매일 저녁 마대 자루에 돈이 그득 찼을 정도로 손님이 넘쳤다.
새우튀김과 초밥이 유명했던 서울회관, 입 안에서 살살 녹았던 부산갈비와 해성갈비의 소갈비, 함흥냉면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신풍냉면, 돼지갈비 격을 한껏 올렸던 화성갈비와 전화 한 통화면 번개처럼 배달 왔던 복순루 등의 맛집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명소들이었다. 이 밖에 술 도매점인 원흥상회를 비롯해 수강한의원, 보성당, 문성당, 황금당, 충북상회, 서안경점, 호일철물, 한창상회, 문화인쇄소, 영일하숙, 홍진하숙 등 수많은 상점들이 발한삼거리의 호황을 유도했다.
당시 <강호>가 붙은 세 집이 묵호에 유명했다. 강호소주는 묵호지서 앞에 높은 굴뚝을 올려 공장의 위용을 자랑했다. 강호사진관은 경찰공무원이었던 권혁찬 씨가 퇴직 후 운영했다. 나중에 신화사진관으로 상호를 변경해 옆으로 이사했고, 그 자리가 발한 1구 사무실과 대한청년단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강호철물>은 <현진건설> 대표이사인 전상표 씨가 젊은 시절 근무했던 철물점이다. 그는 이곳에서 사업 수완을 배워 삼척에서 <현진철물>을 운영하다 건설회사 대표가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 <강호>는 아쉽게도 지금은 한 곳도 남아있지 않다.
발한삼거리 최고의 명소, 묵호극장
발한삼거리 최고명소는 누가 뭐라 해도 <묵호극장>을 빼놓을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극장에서 영화나 쇼, 악극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박장대소하며 찌든 삶의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그러나 묵호극장은 크고 작은 불이 여러 번 발생해 단골 관객들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불은 꼭 겨울에 났다. 이유는 극장주가 <고려목재소>를 운영했던 터에 톱밥을 난방용 난로 연료로 썼기 때문이었다. 극장에 온 손님들은 영화를 보다가도 추워지면 톱밥을 자꾸 난로에 넣는 바람에 연통은 늘 벌겋게 달아올라 천정이나 의자에 불이 붙어 버리곤 했다.
어린 시절 묵호극장에 자주 드나들었던 권순일(남, 66)씨는 옛날 극장을 회상했다.
"묵호극장은 겨울만 되면 크고 작은 불이 났어요. 그러다가 1978년도에 완전히 전소해 버렸어요. 나는 영화보다 쇼를 더 좋아했어요. 박노식, 허장강, 황해 같은 액션배우들이 무대에서 가죽장갑을 끼고 영화처럼 연기를 했어요. 그러다 가수 못지않은 실력으로 노래도 불렀고요. 배우들은 쇼가 끝나면 안묵호의 어판장을 한 바퀴 돌았어요. 우리 발한삼거리 애들은 배우가 마치 이웃집 형이나 된다는 듯이 뒤들 졸졸 따라다녔어요. 그들이 공연을 오면 잠자리는 꼭 묵호극장 옆 <흥진하숙>에서 잤어요.
고향선(가수 윤향기 어머니), 심장마비로 묵호극장 공연 중 사망!
당시 읍의 각종행사는 시내 중심에 있는 묵호극장에서 거의 다 치렀지요. 그중 인상 깊었던 건, 육체미 선발대회(지금의 보디빌딩 대회)였어요.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을 키워 기름칠 한 몸매를 자랑하는 형들이 엄청 부러웠지요. 묵호극장이 생긴 이래 제일 큰 사건은 가수 윤향기, 윤복희의 어머니인 고향선(본명 성경자) 씨가 공연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건이었어요. 해방 전부터 유명한 악극단인 <부길부길쇼>의 윤부길 씨가 그만 마약중독이 되자 , 고전무용가인 고향선이 남편의 약값을 벌기 위해 악극단의 지방공연을 따라다니다가, 묵호극장에서 30살의 나이에 사망한 거죠. 당시 우리 아버지가 경찰이어서 무대에서 병원까지 실려가는 과정을 지켜본 인연으로 훗날 윤향기, 윤복희 씨 노래를 엄청 좋아하셨어요."
묵호극장 옆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형원(남, 62, 전 도의원)씨도 추억이 많았다. 이태리 영화인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에서 촬영기사의 어린 친구로 나오는 소년 <토토>처럼 자기도 영사실에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회상했다.
"나의 어린 시절 놀이터는 묵호극장이었어요. 안묵호와 경계지역에 있는 게구석 앞 문화극장은 이상하게 가지 않았어요. 아마도 떼 지어 다니는 안묵호 아이들이 무서웠던 게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영화가 보고 싶으면 표 끊는 어른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저 좀 데려가 주세요> 하고 부탁해 슬쩍 들어갔지요. 매번 그러다 보니 기도 형한테 잡혀 혼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내가 극장 옆의 두부공장 집 아들인 걸 알고부터는 눈 감아 주었어요.
주로 영사실에서 영화를 봐온 두부공장 집 아들, 김형원 씨
나는 영화를 주로 영사실에서 봤어요. <시네마 천국>처럼 영사기사 아저씨와 친해져 묵호역으로 같이 필름을 찾으러 가기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영화 한 편은 필름 통이 2개였어요. 보통 한 영화를 3일씩 했는데, 묵호역 화물차 편으로 필름 통을 보내고 받고 그랬어요. 내가 어렸을 때 본 영화 중에 제일 기억에 나는 영화는 <월하의 공동묘지> 였어요. 포스터 사진에 유난히 긴 송곳니가 너무 무서웠고, 한문으로 써진 제목이 뭔지 몰랐지만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 봤었죠. 박노식, 황해, 허장강, 도금봉이 나왔지만, 음향과 장면이 너무 무서워 며칠간 잠을 못 잤어요. 지금도 무서운 장면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쳐요."
김형원 씨 부친은 1957년부터 묵호극장 옆에서 두부공장을 했다. 60년대부터는 떡 공장을 겸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모타두부>를 기억하고 있다. 75년까지만 해도 새벽이 되면 두부를 사러 묵호의 여인네들이 줄을 서 기다렸다.
"겨울이 되면 우리 집에서부터 보영백화점(현재 브랭땅)까지 줄을 쭉 섰어요. 추우니 바닥에 고무 다라이를 놓고 줄이 좁혀지면 발로 툭툭 차 앞으로 조금씩 나왔어요. 그런데 그 다라이가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드는 게 눈에 보였어요. 90년 초, 몇몇 두부공장이 지분을 출자해 천곡동에 새 공장을 지을 때까지 겨우 명분만 유지했어요."
발한삼거리 '황금당'
발한삼거리에서 20년 이상 자리를 지키는 점포는 몇 안된다. 그중 <황금당> 박선미(여, 75) 사장은 돈 벌 욕심 없이 가게를 운영하는 중이었다. 도로 확장으로 예전의 반도 안 되는 좁은 점포라 팔 수도 없고 문을 닫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친정인 속초에서 중매로 만난 남편을 만나러 묵호로 처음 온 때가 1969년도였어요. 시외버스 정류소(당시 발한주민센터 입구)에 내렸더니, 반기는 건 탄가루와 오징어 냄새였어요. 보이는 게 온통 시커멓고,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길에서 탄가루가 퍽석 퍽석했어요. 사람들 콧구멍과 손톱마다 새카만 탄가루가 묻어 있었어요. 그렇지만 사람도 많고 경기도 좋아 장사는 눈코 뜰 새 없이 잘 됐어요.
당시 묵호에서 제일 비싼 땅이 강원은행 자리 일대였어요. 중앙시장으로 가는 손님들이 다 우리 가게 앞을 지나갔어요. 영동약방, 보영백화점, 동원한약방, 수강한의원, 경북타월, 태백서점, 서울서점, 오감도, 명동의류, 세일철물 등 수많은 가게가 삼거리 일대에 있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키다 보면, 오전 9시쯤에 사람들이 제일 많이 지나가요. 그런데 전부 저 앞의 건강검진센터로 가는 노인네들뿐이지요."
발한삼거리 일대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한 사람은 <부산갈비>를 운영한 허광선(80,2013) 사장이다. 이젠 일선에서 은퇴를 했지만 동해시 어디로 가든 요식업 원로로 대접받는다. 부산갈비는 <해성갈비>와 함께 묵호에서 최고 요릿집으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나는 6살부터 묵호에 살았기 때문에 완전 토박이인 데다, 학교(북평고등학교) 선후배의 인맥이 든든해 장사하는데 큰 힘이 되었어요. 한 사람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니 식재료를 속일 수 없었어요. 당시 소갈비는 전부 여물 먹고 자란 한우였어요. 묵호 정육점에 고기가 떨어지면 삼척, 도계 철암까지 직접 사러 갔어요. 양념도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고 참기름, 생강, 배, 마늘, 고추장 모두 직접 만든 거라 뒷맛이 좋았어요. 그리고 접시나 그릇 모두 자기로 쓰고, 각 방마다 제일 비싼 도배지로 바르고, 귀한 그림이나 유명 서예인의 작품을 걸었어요. 도우미들도 대구까지 가서 상냥하고 예쁜 아가씨들을 직접 골라 왔지요. 주요 고객은 관공서 단체장과 쌍용, 동양시멘트(현 삼표)의 고위 간부들이었어요.
한 번은 쌍용 간부 26명이 왔는데, 전부 서울대학교 출신이었어요. 술이 취해 노래하는 데 대부분 가곡이나 알알들을 수 없는 팝송을 불렀어요. 우리 집 갈비를 먹으려면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었어요. 내 이름 중에 <광> 자처럼 음식 하나에도 중하게 여긴 탓에 손님이 많았어요. 내 위로 오빠가 둘이어서,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가 좋아했대요. 읍사무소에 출생신고 하러 갔더니 아버지 친구인 호적계장이 귀한 딸이니 바구니에 넣어 선반 위에 키우라며 광주리 <광筐> 자를 이름에 넣었어요. 그런데 이광자를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허 할머니는 80의 나이에도 아직 정정했다. 옛이야기를 더 들으려 하자 손사례를 치며 일어섰다. 며느리와 손자가 운영하는 빵가게로 가야 할 시간이라 했다.
참고문헌_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묵호,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