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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y 10. 2023

문어와 미역, '대진마을' 이야기!

43.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바다에서 많은 돈을 벌어준다는 <돈바위>, 새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새똥바우>를 비롯해 수많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바닷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대진의 바위와 앞바다는 동해안 어느 곳보다 문어가 서식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 <대진마을>이다. 적당한 수심과 완만한 파도로 <서핑의 명소>로도 뜨고 있는 마을이다.
문어와 미역이 넘친, 대진마을

동해 망상해변 남쪽의 노봉마을 굴다리를 지나면 묵호의 <대진마을>이 시작된다. 왼쪽에는 동해 해변이 길게 보이고, 오른쪽 철길 너머로는 어달산이 듬직하게 산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대진 사람들은 이 어달산을 봉화대(지방기념물 13호)가 있다 하여 <봉화산>이라 부르고, 또 그 산 일대에서 모인 물이 흘러내리는 갯가라 하여 해변 이름을 <갯틈이(개테미)>라 불렀다. 대진의 바다와 산은 다른 마을에 비해 유난히 바위가 많다. 어달산은 <범바위>, <호랑바우>, <석 바우>라 불리는 큰 바위가 곳곳에 있고, 바다에도 돈을 많이 벌어준다는 <돈바위>, 새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새똥바우>를 비롯해 수많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바닷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대진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 덕을 톡톡히 보았다. 깊은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문어뿐만 아니라 미역, 다시마, 천초, 우뭇가사리, 섭, 골뱅이, 소라 등을 집 앞바다에서 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진미역>은 부산의 <기장미역> 못지않은 명성을 얻기도 했다. 청정해역의 큰 바위에 착생하고, 바닷가에서 해풍으로 건조하기 때문에 국을 끓이면 곰국처럼 뽀얀 국물이 우러났다. 미역은 퍼지지도 쎄굿지도 않고 야들야들하여, 식감이 졸고 깊은 맛이 우러났다.

미역줍는 마을주민, 사진_동해문화원 DB
대진미역이 한창 명성을 날릴 때,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는 김복수(남, 66)씨는 1960년대 모습을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겨울의 명태 철이 끝나고 봄이 되면 우리 마을 사람들은 말할 것 없고, 어달리, 망상, 옥계, 금진 사람들까지 우리 마을로 미역 캐러 왔어요. 어떤 집은 전 식구가 동원되어 바닷가에 움막까지 지어놓고 역할 분담을 했어요. 아낙네는 주로 바위에서 미역을 캐거나 건지고, 남자 어른은 지게로 나르고, 남자애들은 바닷가에 가마니를 깔거나 걷고, 여자애들은 가마니에 미역 줄기를 척척 쟀지요. 젖은 미역이 해풍에 꾸덕꾸덕 마르기 시작하면 옆에 지키고 있다가 재빠르게 뒤집었지요. 귀한 미역이 누렇게 뜨기라도 하면 낭패였거든요.


미역철이 되면 어달리나 우리 마을 애들은 아예 학교 갈 생각을 못하고 바닷가에서 살았어요. 식구가 많고, 규격대로 잘 된 미역을 뽑은 집들은 군부대로 납품했어요. 규격품 미역은 없어 못 팔 정도였어요. 식구도 적고 건조한 미역이 많지 않은 집들은 중앙시장이나 북평장으로 내다 팔았어요. 미역 냄새가 온몸에 배도록 일해도 배부분 집은 돈 한 푼이라도 더 버느라, 단 묶을 때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나 지치레기로 국을 끓여 먹었지요."

어느 날부터 대진에서 미역은 사라진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많이 나던 미역이 대진 바닷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봉화산>에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미역대신 <꽃바라지 문어>가 바위 곳곳에서모습을 드러냈다. 하늬바람이 부는 이때가 문어의 산란기이기 때문에 연안으로 나와 바위틈 곳곳에 알을 낳았다. 대진의 바위와 앞바다는 동해안의 어느 곳보다 문어가 서식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대진항은 다른 항에서 보기 드문 <문어바리> 배들이 많았다. 문어 잡는 기술도 옛날부터 다른 마을에 비해 한 발 앞서, 똑같은 조건에서도 몇 배 더 많이 잡았다.

<한나루>호 선장인 김만수(남, 58,2013년)씨가 그 비법을 일러주었다.

"옛날, 우리 마을에 우애가 두터운 형제가 살았어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 문어 때문에 사이가 나빠졌대요. 같은 낚시와 돌, 미끼를 써도 꼭 동생이 형보다 몇 배 더 많은 문어를 잡았기 때문이래요. 형이 그 비결을 묻자 동생은 색시가 누구에게도 비법을 가르쳐 주지 말라고 했다면서 거절했대요.


그러다 아버지 제삿날에 형이 동생에게 <아버지 살아생전에 형제 사이에는 비밀 없이 서로 도와주며 살아라, 말씀하시지 않았냐?> 라며 음목주를 자꾸 권하며 비법을 물었대요. 동생은 그만, <아버지의 말씀>이란 말에 넘어가 비법을 털어놓았대요. 그 비법이하는 게 욕심 많은 문어 생리를 이용한 거예요. 즉, 문어 눈에 잘 띄게 끔 납추에 하얀 비닐과 붉은 비닐을 감사고 미끼로 번들거리는 도루묵을 쓰고, 조류를 잘 이용해 까딱까딱 낚싯줄을 당겼다 놔다 하며 약 올려 덥석 물게 했대요.


또, 절대 남한테 말하지 말라며 알려준 게 수장을 이용한 거였어요. 수장은 뱃바닥에 깔린 널판징인데, 추운 겨울날은 손이 시리니 낚싯줄을 매달고 있다 움찔거리면 낚아채라고 일러줬어요. 근데 술 좋아하는 형이 그 비법을 그만 지키지 못하고 자랑하는 바람에 온 동네로 퍼져, 대진 사람 모두 이 방법을 써 문어를 엄청 잡았대요."


문어 잡는 방식은 크게 외줄낚시 봉낚시와 단지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단지는 어둡고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문어를 잘 이용했다. 긴 모릿줄에 대나무, 질그릇, 플라스틱 통을 매달아 일정한 간격으로 바다에 떨어트려 다음날 건져 올리는 방식이다. 이게 발전하여 그물과 철사로 만든 통발이 탄생됐다. 이 통발 안에 돼지비계, 정어리, 도루묵 등 미끼를 넣어 문어 서식지에 던져놓으면, 새끼까지 싹쓸이한다 하여 불법어획으로 엄격하게 통제했다. 배 한 척당 통발을, 2,000개 정도 싣고 다녔으니 씨가 마를 수밖에 없었다. 대진마을도 한때, 이 통발을 이용했지만 법으로 금지한 후에 사라졌다.


대진은 옛날부터 한 손으로 노를 젓고, 한 손으로 낚싯줄을 당기며 잡는 외줄낚시로 문어를 잡았다. 그 후 발달한 어구가 <지가리>였다. 납이나 납작 돌 같은 추에다 낚시를 부착해 문어가 찔리거나 걸리면 줄을 채 올리는 방법이다. 처음은 낚시에 돼지비계, 노가리, 꽁치 등으로 미끼를 달았으나, 후에는 흰색과 붉은색 비닐을 감아 문어를 유혹했다. 지금은 더 반짝이는 은박지가 보편화되었다.


요즈음 대진마을 <문어바리> 어부들은 <지가리>를 부표에 연결해 30~50개씩 달아 새벽 4시쯤 출항해 조류에 흘러가게 놓았다가 오전 10시까지 작업을 했다. 부표의 움직임을 보고 낚싯줄을 들었다 풀었다 하는 작업을 하다 보면 쉴 틈이 없다.


스티로폼이 보온재 어구용품으로 처음 나왔을 때, 아무도 그걸 다른 용도로 쓸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대진마을 사람들이 부두에 나뒹구는 스티로폼을 보고 또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힘주면 뜯겨 나가지만 가벼운 성질을 살리기 위해, 시루떡 썰듯이 직사각형으로 잘라 양쪽으로 나무 중 제일 가벼운 오동나무를 대고 부표를 만들었다. 이 부표에다 <지가리>를 연결해 남쪽의 장호나 북쪽의 고성 앞바다까지 남발이(돌아올 항구를 정하고 연안 바다에 나가는 일) 가면 그곳의 어민들에게 부러움을 샀다고 했다. 지금이야 <지가리>와 부표를 이용해 문어를 잡는 방식이 어디에서나 보편화되었지만, 문어 잡는 기술 하나만큼은 대진마을을 따라올 수 없었다.


대진 일대에서 잡히는 참문어는 갈수록 귀해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 울진, 영덕 등 남쪽 일대에서 주로 잡히는 돌문어는 육질이 단단하고 작지만 참문어는 부드럽고 연해 씹을수록 단맛이 났다. 문어는 주로 연안바다 즉, 육지에서 100m 이내에 서식한다. 알을 낳거나 쉴 때는 바위틈을 이용하지만 평소는 수심 70m 내외의 자갈밭이나 모래밭에서 먹이를 사냥한다.


물살이 세고, 샤니질(뻘밭)이 많은 서해는 옛날부터 문어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서해안 사람들은 '비늘 없는 생선은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라는 속설을 믿었다. 경상도를 비롯한 동해안 사람들은 어물 중에 제일로 치는 것이 문어였다. 문어는 다른 어물에 비해 머리통이 몇십 배 크니 영리하고, 먹물을 품고 사니 선비와 가장 흡사하다고 했다. 손님이 많이 찾아오는 종갓집은 문어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제삿날뿐만 아니라 귀한 손님이 오면 꼭 문어를 대접했다.


<한나루호> 김 선장은 대진마을에서 3대를 살고 있지만, 15년 차 귀행 어민이다. IMF 환난 때, 인천에서 하던 사업을 접고 내려왔지만, 고향에서도 여러 번의 실패를 맛봐야 했다. 특히 어촌지역의 소득증대 일환으로 정부지원금을 받고 시작한 <바다 낚싯배 대여사업>은 빛만 지고 말았다. 겨우 여름 한 철만 반짝 손님이 있었고, 다른 계절은 파리만 날렸기 때문이었다. 수년 전, 문어다리 전용선으로 재미를 볼 때까지 감척도 여러 번 응해야 했다.


"지금은 새집 짓고 살 만큼 여유가 생겼어요. 새벽 3시쯤 일어나 아침 9시까지 바다에서 일하다 포구에 오면 대부분 장대입찰이 끝나있어요. 제일 먼저 포구에 온 배가 잡아온 문어로 긴 장대처럼 한꺼번에 입찰 보는 거지요. 일본말로 야마(몽땅)라 해요. 옛날에는 대중소로 나뉘어 마이당 어림잡아 값을 매겼지만, 즉 입찰자가 100kg을 사고 싶은데, 가격은 kg당 8천 원에 사겠다며 금을 매겨요. 그런데 다른 입찰자 중 8천5백 원에 금을 매기면 순위가 그 사람에게 가는 거죠. 우리가 잡아온 문어는 금을 높게 부른 사람부터 사가기 때문에, 우리도 높은 금을 받으려고 경쟁하듯이 입항을 서두르지요. 이런 모습들이 과거 우리 대진어촌계의 아침 풍경이었어요."

문어잡이 어부와 수경, 사진_동해문화원 DB
참고문헌_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묵호,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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