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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y 11. 2023

죽어서도 피난처, 승지골!

44.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산속 요새 같은 마을, 승지골


명주군 묵호읍 시절(현재 동해 묵호), 산속 깊숙한 곳에 요새 같은 한 마을이 있었다. 바로 ‘승지골’이다. 바닷가의 '묵호항' 일대의 돌담마을에서 서쪽으로 새말, 도두마을, 매동의 수원지, 저수지, 유천당, 동꼬지를 지나야 멀리 승지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양쪽으로 산이 연결되어 있고, 복판에는 들판이 있어 마치 솥 모양의 형국이었다. 산 사이의 골짜기는 소나무 숲이 있고, 멀고 가까운 산 곳곳에  묘지들이 보였다. 이곳에서 6대째 살고 있는 김래홍(남, 77)씨가 구수한 말투로 승지골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승지골, 묘지 쓸 산이 많아 죽어서도 피난처?

"우리 승지골을 보고 어른들이 '옛날부터 살아서도 피난처요, 죽어서도 피난처'라 했어요. 그만큼 읍내와 떨어진 마을이고, 묘지로 쓸 산이 많다는 말이지요. 읍내 사람들이 6.25 때도 우리 마을에 피난을 왔을 정도로 오지여서 인민군도 못 찾을 거라 짐작했던 거지요. 우리 마을은 한 씨들 집성촌인 거지요.


위 청소년 수련관 아래의 솔밭만 하더라도 각기 성이 다른 아홉 분이 의기 투합해 묘목을 심었어요. 나무가 자라 방품림과 방수림 역할을 할 때, 아홉 분이 숲 주위에 집을 지어 이사를 왔어요. 그중에 고 씨 성을 가진 분이 'ㅁ'자 한옥을 지을 만큼 큰 부자였는데, 우래전에 이사를 갔지요. 그리고 세 집은 손 없이 일찍 사망해 여섯 집이 솔밭 인근에 계속 살았어요.

승지골 솔밭, 사진_동해문화원 DB

나는 일찍이 조실부모해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다가 분가해 살았지요. 솔밭은 훗날 우리 승지골의 상징처럼 널리 알려져, 봄, 가을 소풍날이 되면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와 하루 종일 놀다 갔어요. 2002년 루사 태풍 때 우리 마을뿐만 아니라, 저 아랫동네인 부곡마을도 저 솔밭 덕을 봤어요. 토사가 흘러내려 수십 채의 집들을 덮쳤는데, 만약 승지골 솔밭에서 일차로 물길을 막지 않았다면 부곡은 더 큰 피해를 봤을 거라 다들 말했지요. 또, 솔밭을 '소마장'이라 부를 정도로 소들의 휴식처로 사용되었지요. 폭설이 내리면 초록봉이나 무릎재에 살던 노루, 고라니, 멧돼지들도 솔밭으로 피난 왔지요. 늦가을이 되어 솔밭에 갈비가 수북하면 동네 사람들이 불쏘시개용으로 깍지로 긁어 단을 만들어 머리에 이고 갔어요.


우리 승지골 산에는 유난히도 소나무가 잘 자랐어요. 그러나 보니 겨울 한철이 지나면 설해목(눈으로 피해 입은 나무)이 엄청 많았어요. 우리는 촌에 살아도 이 설해목이 많고, 적고를 가지고 정치적인 사건을 미리 점쳤어요. 즉, 5.16 군사혁명이 나던 1961년과 1983년도에 버마 미얀마에서 벌어진 아웅산 테러사건 때도 설해목이 엄청 많았고, 대밭에 꽃이 잔뜩 피었더랬어요.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금년은 나라에 큰일이 생길 것 같아!'라 했는데 다 맞았지요. 나무가 많다 보니 목상들도 많이 찾아왔고, 정월 초하루 서낭제 지낼 때 소 한 마리 잡아 마을에 내놓기도 했어요. 그리고 정작 한겨울은 설해목이 많이 안 생겼지만, 양지쪽 진달래꽃이 피는 입춘이 지날 무렵에 내리는 눈에, 소나무 가지 딱딱 부러지는 소리가 밤새 들렸지요.


낮에는 비가 내리다 밤이 되면 진갈피로 변해 소나무에 착착 쳐 붙으니 그 무게를 견디지 못내 넘어가며 뿌리째 뽑혔지요. 그러면 우리는 신이 나 몸통은 뒷전으로 버려두고, 뿌리부터 손질했어요. 손질된 솔 뿌리를 향로동에 가져가면 좋은 값을 받았지요. 이유는 솔 뿌리가 배 앞부분 붙임목으로 쓰였기 때문이었지요. 소나무 둥치는 한 자 반으로 잘라 장작을 만들어 두었다가, 새벽이 되면 읍내로 지고 가 팔았지요. 겨울철에서 봄까지는 설해목으로 돈을 만들었지만, 여름, 가을에는 솔가지를 잘라 장대를 만들고 한밤중이나 새벽에 덕장으로 가서 팔았지요.


나는 동호초등학교 1회 졸업생인데, 학교를 네 번 옮긴 끝에 졸업했어요. 6.25 막바지 때라 처음은 향로동 변전소 옆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다가, 묵호의 해군막사, 천막병원 등의 학교로 옮겨 다니다 1956년 개교한 동호 학교로 갔지요.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운동장이 붉은 진흙이라 비가 오면 논 삶은 것처럼 찐득거렸어요. 학교까지 반 시간 넘게 걸리기 때문에 새벽 5시가 되면 벌떡 집에서 깨어 소여물부터 끓여놓고, 꼴 한 짐 베어놓고 학교로 갔어요.


장마철이 되면 고역이었어요. 소를 솔밭에 묶어놓고 비 쫄랑 맞으며 꼴 한점 베어 등에 지고, 솔밭에 가면 동네 소들이 전부 모여 있어 소똥 냄새가 진동했고, 바닥은 소 똥으로 질벅거렸어요. 방학이 되면 무릎재나 예천봉으로 소를 몰고 갔는데, 제일 신경 쓰는 게 소들이 묘 둥지를 못 밟게라는 거였어요. 그때만 해도 부잣집을 포함한 대부분 가정에서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게 조상 산소였어요. 그리고 그런 집은 머슴들이 꼭 있어, 그 형들이 산에 가면 대장 노릇 했지요.


우리 승지골 부자 중에 최용길 씨는 큰 부자였어요. 부친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유학을 갔다 오고 6.25 때는 미군통역을 했어요.  선거도 두 번이나 출마해 다 떨어졌지만, 승지골에 큰 잠실이 있었고, 발한삼거리에 삼일당 집이며 해평에 수천 평의 땅이 있었지요. 부자 몇 집을 제외하고 승지골에 사는 사람들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았어요. 방 두 칸에 부엌 달린 집 40여 가옥에 살며, 농사짓고 소 키우며 큰 욕심 없는 이웃이었어요. 나는 아이들(2남 4녀)이 늘자, 농사지어서는 도저히 공부를 가르칠 수 없을 것 같아 직장을 찾았어요. 친척의 소개로 북평장터의 '남상국정미소'에 근무할 수 있었어요. 정부양곡을 도정하는 큰 정미소인데, 힘스는 일이 많았어요. 체격은 작아도 남에게 지기 싫어한 나는 80kg 보리가마를 갈고리로 찍어 등에 메고 창고에 쌓는 일을 거뜬히 해냈어요.


나중에는 자크(지퍼) 달린 자루가 나왔는데, 40kg짜리 백미를 하룻 저녁에 1,000포씩 쌓았지요. 정미소는 70년대 중반에 효가리로 이전해 '북삼정미소'를 신축했는데 나도 따라갔어요. 이때 남 사장이 기르던 사슴 세 마이를 내가 키우게 됐어요. 당시 쌀 한 가마에 4만 원 할 때, 월에 한 마리당 5만 원씩 쳐준다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사료가 없어 퇴근하면 아카시아, 떡갈잎, 칡덩굴을 뜯어 마당에 말렸다가 겨울철 먹이로 썼지요. 나중에 세 마리가  10마리가 되자 남 사장이 다 처분했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광희학교에서 기르던 사슴을 갖고 와 키워 달랬어요. 나는 출근 전에 집 근처의 풀들은 농약 때문에 산으로 가서 아릴 때처럼 꼴을 한 짐씩 베어 왔어요. 이때 닭 몇 마리를 길렀는데, 신기하게도 꿩처럼 잘 날아 감나무 꼭대기까지 날아갔지요.


나는 정미소에서 35년을 근무하다 퇴직해, 몇 년째 신선놀음을 하고 있어요. 여름철에 저기 솔밭에서 환경감시원으로 일하고, 평소는 이들이 지어놓은 양계장을  돌보며 청계 알을 하나씩 ㄸ깨어 입안에 털어 넣으며 살고 있지요. 난 승지골에서 태어나 살면서 세 번이나 이사를 했는데, 2년 전에 아내가 동부메탈에 다니며 모았던 돈과 내가 정미소에서 번 돈을 합쳐 이층 집을 지었어요. 나는 조실부모하고 어렵게 살다, 노후에 이만큼 사는 건 다 조상님과 우리 승지콜 이웃 덕이라 여기며 살지요."

부곡에 상수시설이 들어선 이유, 우수한 수질 때문

승지골과 붙어 있는 부곡 7통은 동해시를 대표하는 '동해향교', '수원지', '구 상수 시설', '묵호고등학교', '농업업기술센터' 등이 있다. 근대문화유산 142호로 지정된 '구 상수시설'은 일제강점기 시절(1940년) 최첨단 시설로 승지골에서 내려오는 물을 담수하여 찌꺼기를 버리고 여과하여 깨끗하고 맑은 물을 만들었다. 승지골 박호경(56세, 부곡동) 통장은 부곡이 상수시설을 하게 된 이유는 수질 때문이라 강조했다.

"우리 승지골은 골이 많고 산에 나무가 많아 옛날부터 물맛이 좋은 데다 양도 많았어요. 일본인 기술자들이 묵호항에 부두를 만들어, 무연탄을 싣고 갈 배네 식수를 제공하기 위해 일대 하천을 다 조사했대요. 옥계, 망상, 발한, 부곡 모두 조사한 결과 우리 승지골 물이 우선으로 채택되었어요. 물을 떠서 분석해 보니 승지골 물은 미끌미끌하고 오래 놔두어도 이끼가 끼지 않았대요. 그런데 우리 마을이 장수촌이 안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막걸리 때문이라는 우스갯말이 있어요. 즉, 승지골 물이 좋아 집집마다 술을 담가 마시다 보니, 술맛이 좋아 너무 많이 마셔 수명을 단축했다는 거지요.


그리고 우리 마을은 수십 년 전부터 '장의葬儀'업을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 시초가 동해시 개청과 승지골 풍수와 관련이 있지요. 1980년 북평읍과 묵호읍을 합쳐 천곡리에 신시가지를 만들 때 곳곳에 있었던 묘지 이장을 많이 했어요. 이때 일을 많이 맡으신 분이 88장의사를 하던 김진흥이란 분인데, 우리 마을의 이장용이란 분과 친분이 돈독했어요.. 이분은 구학문이 깊고 풍수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어서 승지골 야산 곳곳으로 이장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농사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장의업에 많이 ㅍ참여하게 되었어요. 상갓집의 장묘 일은 경험이 많아야 일이 쉽고 힘이 들지 않았어요.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에 상여와 상석, 축대석, 비석을 운반하는 일은 전문가가 아니면 못 하지요.

동해청소년수련관, 사진_동해문화원 DB

승지골의 변화는 '삼세미' 아래에 있는 '동해시청소년수련관'건립이지요. 당시 최연희 국회의원이 애쓴 덕에 예산을 확보해 1999년 작공을 했지요. 승지골 토박이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천지개벽과 같다 봐야지요. 겨우 소나 지게진 사람이 걸을 정도의 오솔길이 수련관 덕에 경운기나 차가 다닐 만큼 길이 생겼으니까요. 수련관은 시내와 멀고 길이 좋지 않은 데다, 하천이 옆에 있다 보니 2002년에야 준공이 되었어요. 깊은 산속에 건물이 들어서고, 청소년들이 연이어 찾아오니 승지골 전체에 활기가 넘쳤어요.


그런데 8월 말 태풍 루사가 밀어닥쳐 하천 일대가 초토화되었는데, 복구하는 과정에서 하전을 정비하고 도로를 확장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요. 수련관은 시 직영과 위탁경영을 번갈아 가며 오늘에 이르렀어요.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각종 교육을 받으러 찾아왔어요. 도자기, 막걸리, 원두커피 등을 가르쳤고, 여름이 되면 수영장이 있어 많은 학부모가 찾아왔어요. 이때마다 솔밭과 승지골의 낯선 풍광에 한참 구경하지요. 바람이 있다면, 솔밭 인근에 주차장 시설을 확장해야 더 많은 주민들이 승지골을 찾을 것 같아요."

참고문헌_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동해,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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