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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y 12. 2023

재건학교와 사방사업 이야기!

45.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재건학교와 사방사업?


사방공사는 수력 및 풍력에 의해 토사. 자갈이 이동하여 발생하는 각종 재해를 예방하고 복구하는 공사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중요한 사업이다. 붕괴지와 황폐지 또는 붕괴 우려지에 토목공사를 실시하고 식생을 조성함으로써 상류 산지사면과 계류의 황폐화를 막고, 불안정 사면의 고정, 토사와 자갈의 생산 및 이동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경관을 조성하며 산사태, 토석류와 홍수로부터 발생되는 산지재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사방사업을 실시하며 더 나아가서는 사방사업을 통하여 산림자원 생산의 기반조성은 물론이고 공공이익의 증진과 산업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산림의 공익적 기능을 증진시키므로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업이다.


5.16 직후인 1961년 6월, 국민의 재건의식을 높이기 위해 범국민운동의 일환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설치됐다. 당시 전국의 산들은 붉은 속살이 드러났고, 매년 되풀이되는 보릿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재건국민운동'은 훗날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의 전초에 해당했다. 마을마다 재해, 기아를 추방하고, 주거환경과 마을 길을 개선하고, 노력운동을 전개했다. 또, 의식개혁으로 문맹퇴치, 가족계획, 시간관념 고취, 국민저축 등의 생활개선을 유도했다.

지금의 동해지역에서 3년 재건운동의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김문극(남, 87)씨가 아득했던 옛 시설을 기억해 냈다.

"군 생활을 만기제대(1962)해 집으로 돌아왔더니 일자리가 없었어요. 부모님 도우며 1년쯤 농사를 짓다 보니 삼척군청 소속의 '사방관리소'에 '사방수'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사방관리소'는 훗날 '사방사업소'로 바뀌었는데 주로 산림녹화를 전담하는 부서였지요. '사방수'는 산림녹화 현장 감독이었지요. 집 가까이 있는 산은 사유림이 많아, 산 주인이 밤낮으로 지키는 바람에 나무들이 어느 정도 살아있었지만, 국유림은 거의 다 붉은 땅이 드러나 있었어요. 그 시절은 연탄아궁이가 널리 보급되기 전이라 누구라 할 것 없이 밥하고, 구들장 뜨시게 하기 위해 산의 나무를 베어 아궁이에 떼어야만 했지요. 게다가 집에 돈이 필요하면 아무리 산림 감시원이 지키고, 벌금을 물린다고 엄포를 놓아도 한밤중에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 장에 팔았지요.

1960년대 사방사업, 사진_동해문화원 DB

그러다 보니 붉은 땅이 많은 산에 큰비만 왔다 하면 동시다발로 산사태가 생겨 동네마다 말이 아니었지요. 재건국민운동사업의 하나로 사방사업砂防事業이 전국 곳곳에서 이루어졌지요. 북평읍에서도 5명의 '사방수'를 모집했는데, 나는 효가리, 천곡리, 쇄운리 일대의 산을 담당했는데 3년 간 근무했지요. 나무 없는 경사지를 남자들이 삽과 곡괭이로 계단식으로 만들고 구덩이를 일정한 간격으로 파놓아요. 그러면 여자들이 엄지 손가락 굵기의 아카시아 나무를 심고 물을 한 바가지 준 다음, 흙을 덮어 발로 꾹꾹 밟아 다져놓았어요. 나는 1년 후, 공사현장을 돌아다니며 살아있는 아카시아에 귀한 비료를 한 주먹씩 주었어요. 왜 직접 주었는가 하면, 당시 비료가 워낙 귀해 도난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지요.


아카시아를 심은 이유는 뿌리가 넓게 잘 펴지고 빨리 크기 때문이지요. 산사태를 막고, 땔감으로 적당하다는 이유로 사방사업의 최적의 나무로 꼽혔어요. 또, 훗날 아카시아로 득을 제일 많이 본 사람은 양봉업자들이지요. 60년이 지난 요즈음, 5월이면 온 산에 활짝 핀 아카시아 꽃을 보며 나무 심던 그때가 떠오르지요. 그때는 일자리가 귀해, 동네 사람들이 너도나도 산에 일하려 했어요. 그래서 이장에게 동네 가구의 명단을 달라고 해서 돌아가며 골고루 한 집에 한 명씩 일을 하게 했어요. 하루 일이 끝나면 배급표 용지에 도장을 찍어줬어요. 한 달 동안 도장 30개가 찍힌 배급표를 갖고 현장사무소로 가면 40kg짜리 밀가루 한포를 주었어요. 지금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 밀가루 한 포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지요. 하루 한 끼는 거의 다 이 밀가루로 만든 칼국수를 먹었던 시설이었으니까요."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다시 '재건국민운동중앙회'(1964년)를 발족하여 전국 각 지역에 지부를 두었다. 지부는 '재건청년회'와 '재건부녀회'를 조직하여 각 가정의 부엌, 화장실, 거실 등 주거환경 개선을 독려했다. 또,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을 시행하고 표준의례 준칙 제정에 따른 준수를 강조했다. 북평읍에서도 '재건국민운동 북평읍위원회'(1966년)를 발족했다. 당시 읍장은 이상극 씨였는데, '사방관리소'에 근무했던 김문국 씨를 위원회의 간사로 추천했다.

1960년대 동화당약방, 사진_동해문화원DB

"1966이 되자 북평지역의 '사방관리소'가 문을 닫게 되었어요. 마을 인근의 산 중에 대부분 사방사업을 마쳤기 때문이지요. 때마침 '재건국민운동중앙회'의 북평읍위원회가 설립되어 위원장에 안봉기 씨가 취임하셨어요. 이분의 집은 북평읍내 덕취원 옆에 있는 이층 집이었고, '동화당약방'과 가축병원을 겸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극 읍장이 나를 부르더니 위원회 간사 직을 맡으라고 했어요. 이 읍장은 내가 북평중, 고 다닐 때 은사님으로, 평소 친분이 돈독했어요. 나는 일자리를 찾던 터라 감사의 마음으로 수락하고 안 위원장께 인사드리고 사무실에 출근했어요.

문맹퇴치 일환, 재건중학교 설립되던 시기

중앙회에서 문맹퇴치 일환으로 각 지역위원회에서 '재건중학교'를 설립하라는 독촉장을 보내왔어요. 그러면서 1개월에 각 과목당 한 권씩 중학교 과정의 책을 무상으로 내려보낸다고 했어요. 위원장과 간사는 각 지역 유지와 공장을 찾아가 설립 협조 요청을 하라고 했어요. 안 위원장은 김진만 국회의원을 만나러 서울로 올라가고, 나는 지역 유지들은 만나 학용품 지원을 부탁했어요. 자전거 한 대를 사서 각 마을로 타고 다니며 중학교 과정의 무상교육을 한다고 홍보했어요. 진학을 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공짜교육을 시켜준다고 하니,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마음이 움직여 30여 명이나 등록을 했어요. 나는 고무되어 다시 여기저기 다니며 학용품, 교복 지원에 대한 약속을 구체적으로 받아냈어요.


학생들이 확보되자, 교실을 찾기 시작했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어요. 결국 위원장 협조를 받아 약방 이 층에서 일주일 중 이틀을 빌려 공부를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학생들이 매일 공부하고 싶다고 졸라, 구미 2리(현 북평동 3통) 공회당으로 옮겨 수업을 했어요. 그런데 교실은 책걸상 하나 없이 차고 딱딱한 시멘트 맨바닥이라 학생들이 엉덩이를 자구 뒤척여 수업이 제대로 안 되었어요. 나는 할 후 없다는 듯 학생들과 같이 각 농가를 다니며 헌 가마니를 구해 반으로 잘라 바닥에 깔고 수업을 다시 시작했지요. 재건중학교 교훈이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우자'이니 공무만 할 수 없었어요. 중앙회에서 피마자를 재배하라며 종자를 내려 보냈어요. 밭이 없어 온 사방 찾다가 북평여고(현 광희고 자리) 벚나무가 있는 울타리 밑으로 종자를 뿌렸어요. 가을에 2말을 수확해 중앙회에 올려 보냈더니, 교과서를 한 박스 보내왔어요.

우리가 벌어서 우리가 간다. 수학여행!

학생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일반 중학교처럼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어요. 경비는 '우리가 벌어서 간다!' 라 정해, 학생들과 같이 돈 벌만 한 일거리를 찾아 나섰어요. 이미 우리는 겨울철의 보리밭 밟기, 보리타작 도와주기, 감자 캐기, 풀 뽑아주기 등은 봉사차원으로 하고 있었어요. 처음으로 돈이 생기는 일이 북평다리 및에서 차에다 모래를 실어주는 거였어요. 학생들 중 덩치 큰 애들은 교대로 삽질하게 해서 노임을 받아 저축을 시작했어요.


봄이 되면 칡뿌리를 캐서 장에 팔고 여름방학이 되면 여학생들은 아카시아 잎을 따고, 남학생들은 칡넝쿨을 훑어서 '설운골'의 앙골라 토끼농장과 북평성당에 팔아 저축했어요. 이렇게 1년쯤 각 학년별로 노력봉사하면 2박 3일 경주 수학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어요.


선생님들도 철저하게 무보수 봉사 정신으로 일관했어요. 군대 입대하기 전의 대학생, 공무원 고시준비생, 합격 후 발령대기자, 봉사정신 투철한 선생들을 모셨지요. 수업 중에 제일 신경을 쓴 과목은 주산과 한문이었어요. 이유는 사회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생활인이 되려면 매일 한문이 있는 신문을 읽고, 한 가지 정도의 특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름방학이 되면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에게 24시간 교실에서 먹고 자고 공부해서 고입 검정고시를 보던 시기죠.


결과 여려 명이 진학해 우리 학교 명예를 높였지요. 그런데 나 자신이 평생 봉사 정신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학부형을 비롯해 내 주위 여러 지인께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지요. 평생을 받기만 하고 주지 못했으니, 지금도 먹을 자리에 가서 떳떳하게 밥값 한 번 내지를 못했지요.


교실 확보는 전적으로 이상극 읍장과 송도영 소방대장의 힘이 컸어요. 공회당에서 공부 한지 석 달쯤 지났을까, 이 읍장이 불러서 갔더니 종탑이 있는 소방서 2층을 쓰라고 했어요. 기쁜 마음에 쫓아 올라가 봤더니 널찍하긴 한데, 깨어진 유리창에 바닥 위에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고, 온갖 쓰레기가 널려 있었어요. 그래도, 어디야!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사 준비를 서둘었어요. 며칠 동안 학생들과 함께 쓸고 닦고를 반복했더니, 드디어 우리 교실이 생겼어요. 게다가 주위에는 고마운 분들이 계셨어요. 이 중에 가장 고마운 분이 북평초등학교 장문기 교장이 있었어요. 학교에 꼭 필요한 흑판과 분필, 책상과 의장 등으로 지속적으로 지원해 주셨어요.


새것이 아니라 폐기할 목적으로 교실에서 철수한 자재 중에 쓸 만한 것을 따로 모았다가 가져가라고 연락을 했어요. 책걸상이 작았지만, 바닥 몇 배나 좋았어요. 훗날 중학생 체격에 맞는 책걸상을 구할 때까지 몸을 작게 낮춰 사용해야만 했지요. 또, 바닥이 얇은 나무판자이다 보니 작은 소리까지 아래층까지 들리곤 했지요. 더구나 1층은 소방차 대기실과 운전기사네 가족이 사는 방이 있었어요. 오랫동안 가족처럼 지냈지만 '호랑이 아줌마;가 '조용히 해!'라 소리치면 학생들이 꼼짝 못 했지요. 다음 해 신입생을 받게 되자 마당 안쪽에 있는 창고를 정리해 교실로 사용했지요. 3년 차 되던 해에는 마침 소방차 대기실이 읍사무소 앞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1층을 교실로 사용해, 드디어 1,2, 3학년 학생들 모두 자기들 교실을 갖게 되었지요.


교복은 '삼척산업'(현 DB메탈) 2년에 걸쳐 전교생에게 한벌씩 후원해 주셨어요. 처음은 교복을 대, 중, 소로 나눠 구입해 주다, 나중에는 학교 옆의 양복점과 양장점에 계약을 맺어 치수에 맞게 맞춤으로 지원해 주었어요. 당시 많은 도움 준 분 중에 안우흠, 홍순영, 황두중, 신원수 님은 지속적으로 노트, 연필 등의 학용품을 지원해 주었지요. 특히 정미소를 운영하는 남상국 사장은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에게 입학금 일체를 납입해 주셨죠. 남 사장의 수혜를 받은 학생 둥에 오복자는 북평여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는데, 몇 달이 지난 후 교감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오복자가 신앙 때문에서 토요일이 되면 학교로 안 나오니 타일러 달라고 했어요.


마지못해서 만나 이야기해 보았지만 벌써 신앙심이 깊어 소용없었어요. 오복자는 후에 삼육대학에 진학했고, 현재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지요. 학생들은 매년 늘어 한 학년 한 반에 전체 200여 명이 다니기도 했지요. 어느 해에는 '삼화사'의 주지 스님이 가르치던 10명의 학생이 동네 이장의 소개로 우리 학교에 전학을 오기도 했지요. 1968년 드디어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어요. 재건국민운동위원회 회원은 물론 각 기관단체장과 유지, 학부형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였어요. 기관단체장의 덕담에 이어 재학생의 졸업식 송사가 끝나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졸업생의 답사 내용 중에 첫 구절을 읽었을 뿐인데, 곳곳에서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나도 고생했던 일들이 떠올라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북평읍사무소,제7회 졸업식 1976년, 사진_동해문화원 DB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또, 신입생이 입학하던 1969년은 나에게 여러 일이 겹쳤어요. 우리 학교를 취재한 '양지를 찾아서'란 프로가 1주일이나 방송에 소개되고, 중앙지와 지방지에서 기자가 돌아가며 취재를 해서 신문에 실었어요. 나는 재건사업에 뛰어든 지 4년 만에 문화공보부 장관이 수여하는 향토문화 상록수 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어요. 나 대신 집안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한 어머니와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지요."

참고문헌_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동해,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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