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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y 06. 2023

철광석 출하 중심, '삼화역' 추억여행!

40.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삼화역은 근대산업 시작인 동해 삼화지역 철광석, 시멘트 등 반제품 출하의 중심이었다.

동해 북평역과 삼화역을 잇는 철로는 7KM의 거리에 '삼화역'은 1966년 12월 착공해 이듬해인 1967년 11월 개통한 산업철도였다. 이 철로로 쌍용 C&E 동해공장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시멘트와 반제품인 클링커(석탄이 고열에 타고 남은 단단한 물질)를 화차로 전국에 출하했다. 1979년, 42번 국도가 확 포장되고 동해항까지 컨베이너 벨트로 클링커를 수송하기 전까지 삼화역은 출하의 중심지였다. '북평선'이라 불리는 이 철도는 삼화철산이 들어서던 시절 1943년 4월에 개통했던 협궤 철로를 확장 보수해 만들었다. 당시 구간은 삼화제철소(대동아파트 일대)에서 삼화철산(삼화 2리)까지였고, 철산에서 채굴한 철광석을 운반하기 위한 철로였다.


쌍용은 공장 건설과 함께 철도 개설공사를 같이 시작했다. 도로는 비포장 신작로가 전부였기 때문에 제품 출하를 위해 철로가 필수적이었다. 철로는 다행히 기존 가시랑 차(협괴철로) 길이 있어 진전이 빨랐다. 공장 준공과 함께 시멘트 출하가 시작되었다. 당시 출하 전담부서는 '동양통신'이라는 쌍용의 방계회사였다. 소장은 북평읍장을 역임했던 이상극 씨였다. 제품과 포장실 6기의 펙가(포장기계)가 있었다. 포장원들은 펙카 앞에 앉아 3겹으로 만든 종이지대 주입구를 손가락으로 벌려 마무스에 꼽는 반복 작업을 했다.

삼화역 디젤기관차 첫 운행, 1968년, 사진_동해문화원 DB
당시의 경험을 정의언(남,80)씨가 수필집 '배골삽화'에 남겼다.

"준공식을 마친 후, 공장 정문에 '1일 9만 대 돌파'라 슨 현수막을 걸었다. 돌파를 하자 이번엔 '1일 10만 대 돌파'라 쓴 현수막을 또 내 걸었다. 10만 대(4,000톤)는 30톤 화차로 100량이 넘었다. 회사에서는 포상금을 내걸어 30톤 화차를 25분 만에 뽑으면 번개급, 27분은 귀신급, 다음은 장려급이라며 호칭을 주었다. 당시 번개급 호칭을 단 동료는 24명 중 4명이었다. 그중에 나도 포함되었다. 하루는 주민등록증을 만들려고 지서에 갔더니, 순경이 나를 이상하게 보았다. 왜 그러냐 물으니 지문이 없으니 돌아가라 했다. 나는 다음날부터 장갑을 끼고 포장을 했다. 당연히 한 단계 아래인 귀신급으로 밀려났다. 또 잠자리에 들면 손끝이 아려와 잠을 잘 수 없던 시절이다. 담당과장은 자주 음료수가 든 상자를 어깨에 메고 포장실을 들려 포장원들을 격려했다."


포장원들은 판넬, 검수, 포장, 기계점검 팀으로 나눠 3교대를 했던 시절이다. 포장실은 귀를 먹먹하게 하는 기계소리와 분진이 늘 그득했다. 조를 짜 화차 작업 한 량이 끝나면 뒷 교대가 포장작업 할 수 있게 지대를 옆에 쌓아주었다. 점검 팀은 사일로(Silo)에서 포장기계로 시멘트가 잘 나오게 수시로 코팅 덩어리를 제거하고 청소를 했다. 포장 팀은 손가락 지문이 닳도록 재빠르게 지대의 주입구를 벌려 마우스에 꼽아야 했다. 검수 팀은 벨트를 타고 오는 시멘트 포대를 당겨 저울에 달아 40kg을 중심으로 상한과 하한을 넘지 않게 판넬공에게 신호를 보냈다. 1kg이 더 들어가면 괜찮지만 미달이 되면 소비자의 집중 민원이 되었다.


이층 포장실에서 죽어라 시멘트 포대를 내려보내면 운수노조원들이 화차에 적재했다. 적재한 화차가 10량이 되면 쌍용 소속 기관사는 조치수 깃발 신호에 따라 삼화역으로 싣고 갔다. 평균 주간 40량, 야간 40량 이상이었다. 그들은 구내로 돌아올 때 공차를 연결해 포장실 앞의 작업장까지 왔다. 또 다른 레일에 길게 늘어선 탱크 화차는 벌크를 실었다. 이 화차는 레미콘공장이 있는 역으로 수송되었다. 묵호공장이 준공되자 클링커를 적재한 화차와 탱크 화차가 부지런히 오갔다. 묵호항을 통해 제주도를 비롯 한 전국의 항구로 포장시멘트, 벌크시멘트, 클링커 등이 출하되었다. 이때만 해도 설비가 미흡해 선적 시 분진이 허옇게 항구를 뒤덮곤 하였다.

교통부장관 삼화역으로 쌍용C&E 방문, 1968년
삼화역에 파견되어 보선반에서 근무했던 홍국표(남, 77세, 2015년)씨가 초창기 모습을 회상했다.

"당시 철도원들은 보수가 형편없었어요. 그런데 쌍용에서 철도 근무자를 뽑는다 하자 서로 가려고 했지요. 보수가 세 배나 차이가 났으니까요. 결국 기관사 3명, 조차수 6명이 치열한 경쟁을 거쳐 이상극 소장에 의해 스카우트됐지요. 우리 보선반은 북평역에서 삼화역까지 담당 구역이었지만, 윗사람 지시로 쌍용 구내로 자주 지원 나갔지요. 워낙 많은 화차가 드나들고, 시멘트에 허옇게 코팅되다 보니 침목이 많이 상했지요. 또, 레일을 고정하는 스파이크나 앙카가 수시로 나갔지요. 만약에 부식한 침목을 제때 교체 안 해주면 열차가 탈선되는 대형사고가 나지요. 그래서 우리 같은 전문가들이 필요했지요. 찾아내는 거나 교체하는 거나 귀신같은 솜씨였지요. 쌍용 측 소속의 보선공이 있었지만, 그들은 침목 한 개 교체하는데도 하루 종일 걸렸지요. 그 바람에 우리도 입에 호강을 누렸어요. 당시 삼화는 하룻밤 자고 나면 술집이 하나 생길 정도로 호황이었지요. 우리가 쌍용 요청으로 구내 철로에 지원을 가면, 수고했다며 돈 걱정 없이 술을 마실 수 있게 배려했기 때문이지요."


백(Bag) 시멘트가 벨트를 타고 5cm 간격으로 슈트에 오면, 운수노조원들이 귀퉁이를 잡고 배에 붙여 가져가 적재를 했다. 허리까지 단을 쌓기는 쉬워도 그 이상은 허리를 한번 튕겨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들었다.

당시 40년 동안 운수노조원으로 일했던 강억기(남, 67세, 2015년)씨는 돌이키기 싫다는 듯 고개부터 저었다. 요즈음 젊은이는 그 일을 하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거라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작업복에 소금 꽃이 마를 날이 없었던 시절

"당시 우리는 도시락을 3개씩 싸갔지요. 주간 반 때는 12시 점심때는 물론이고 10시, 15시 참 시간 때도 곡기를 채워야 했지요. 겨울철은 덜했지만 여름철이 되면 수시로 소금을 입에 털어 넣었지요. 땀에 밴 작업복에 소금 꽃이 마를 날이 없었지요. 쇠로 된 화차 역에다 시멘트 열기가 합쳐 40kg 백 시멘트를 받아치는라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지요. 그때는 또 불량지대가 많아 수시로 난대가 났어요. 아무리 조심스럽게 놓아도 지대 재봉이 약한 거는 그대로 터졌어요. 원칙은 그걸 꺼내야 하지만 너무 힘이 들고 귀찮아 그대로 실어 보내요. 안 꺼내는 대신 터진 만큼 더 실어 주곤 했지요. 그러면 출하과 요원들이 지대가 모자란다고 성화를 부렸지요. 또, 포장원과도 자주 다퉜지요. 우리가 볼 때 그들은 가만히 앉아 지대를 꼽으면 됐지만, 우리는 그 무거운 백을 들고 돌아쳐야 하잖아요. 그런데 검수원들이 난대를 벨트에서 끄 집어내야 하는데, 놓칠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밑에 있는 우리가 시멘트 가루를 그대로 뒤집어써야 했지요. 게다가 뜨거운 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씻어내느라 자리를 비우게 되지요. 그리되면 작업량이 줄지, 팀원이 빠지니 힘이 더 들기 때문에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지요. 저들은 월급을 받지만 우리는 도급제이니 적게 일하면 그만큼 돈이 적었지요."


삼화 일대에서 중,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삼화역이 생기자 누구보다 기뻐했다. 화물차 꽁무니에 객차가 달랑 한 량이 달려 있었지만 감지덕지했다. 그러나 여학생들은 북평역에서 학교까지 가까웠지만, 남학생들은 효가리까지 가야 하니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당시 고등학교를 다녔던 이동형(남, 63세, 2015년)씨가 패기만만했던 그 시절을 기억했다.

"삼화역에서 기차에 오르면, 북평여자중고등학교 못지않게 삼척공전(현 강원대학교 삼척캠퍼스)에 다니는 학생들이 제일 유리했지요. 북평역에서 삼척선으로 갈아타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북평중고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제일 애 먹었지요. 당시 송정애들은 해수욕장과 역이 있어 무척 쎄물스러웠지요. 우리가 삼화 촌에서 송정역까지 왔다가 자기들 숲에 끼어 학교에 가는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요. 그들은 기질적으로 워낙 억센 데 수가 많으니, 우리는 끽소리도 못 냈어요. 그러나 하나 둘 깡이 생긴 학생들이 늘어났지요. 학교 앞 제철소를 지날 때, 가방을 먼저 던져놓고 기차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거였지요. 처음은 무섭고 두려웠지만 한 번 해보니 용기가 났지요. 기관사도 우리가 자꾸 뛰어내리자 아예  천천히 달려주었어요. 당시 제철소는 가동되지 않아 불량 학생들의 은신처였지요. 주위에 돌도 많고 칸도 많아 어지간한 배짱이 없으면 근처에 얼씬도 안 했지요. 그런데 기차에서 뛰어내릴 정도의 깡이 있는, 삼화애들이 가끔 그곳에서 송정애들과 맞짱을 뜨곤 했지요."

참고문헌_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삼화,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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