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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y 05. 2023

화려했던 묵호, 발한삼거리!

39.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1980년 4월 명주군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이 합쳐 동해시 승격으로 탄생한 발한은 명주군 묵호읍 발한 1, 4, 7, 8리가 발한동으로 편입 승격 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옛 발한 1,2,7,8,21를 합쳐 발한동이라 했다. 이 마을은 원래 청주 한 씨가 개척했다고 하여 동네 이름을 발한이라 했는데 그 후 한 씨 후손들이 마을 이름에 성을 사용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된다고 해서 한(韓) 자를 한(翰) 자로 고쳐 발한이라 하였다고 한다. 1998년 인구 5,000명 미만의 과소통폐합에 의거 향로동과 통합 새로운 발한동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마을 유래는 큰 바란이(발한)로 사재 말랑에서 서쪽 골안에 있는 마을이 있다. 마을엔 11 가구가 살았고 서낭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낭제를 지내지 않는다. 작은 바란이(발한)로 묵호 초등학교 뒤에 있는 마을, 밭 가운데 마을 서낭당이 있었다. 밤나무골은 묵호 초등학교 앞 내 건너 언덕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주택들이 들어섰다. 발한 마을의 거리는 현 시가지 중심 지역. 전 강원은행, 한일은행 등 상가가 있는 길거리. 1937년 묵호항이 개항되면서부터 삼척지역에서 생산되는 무연탄 수송을 위해 무연탄을 집산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느릅재에서 발원한 발한천은 묵호초등학교 앞을 지나 중앙시장을 거쳐 묵호신협 옆으로 해서 바다로 흘러나갔다.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그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원로의 증언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8살 때(1941년) 부모님 따라 경상도에서 이사 온 김두조(남, 80,2013년) 씨는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버지는 묵호에 와 게구석(게가 많이 난다 하여 붙여진 지명)에 이사와 자리를 잡았어. 우리 집 바로 옆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바위 위에서 다이빙하며 놀았지. 발한천도 얼마나 깨끗한지 목욕도 하고 양치한 후 그 물로 입안을 헹굴 정도였어. 붕어며 미꾸라지도 살아 바구니로 잡기도 했지. 동해목욕탕 자리는 큰 버드나무가 있어, 동네 빨래터이자 놀이터였어.

발한삼거리, 사진_동해문화원 DB

보영백화점(현재, 브랭땅)이 있던 곳 해변 일대는 크고 작은 정어리 공장과 염전이 수십 개 있었어. 전쟁이 막바지라 기름이 부족해 정어리뿐만 아니라 온갖 고기 내장을 큰 가마솥에 넣고 찐 후 기계로 돌려 기름을 짰어. 항만 축조공사가 끝나, 도계에서 기차로 석탄을 싣고 오자 일본 기술자들이 하역 구조물을 해변에서 만들었어. 아시바를 올리고 판자를 잘라 못질해 큰 틀을 만들고 철근을 깔더니, 거기다 자갈 모래 시멘트를 이겨 부었어. 그 콘크리트 구조물이 건조되자, 항구 안에 있는 무연탄 하역장까지 끌고 가는 데 큰 구경거리였어. 바닥에 큰 각목을 놓고 경사지게 해 수십 개 양초를 발라 미끄러지게 했어.

해방 직전은 하루에 몇 번씩 미군 비행기가 묵호항 일대에 폭탄을 투어 했어. 우리는 교문(묵호초등학교) 양쪽으로 방공호를 파다가 비행기 소리가 나면 재빠르게 피신하곤 했지. 6.25 후에도 묵호는 볼거리가 넘쳐났어. 더구나 미제가 일제의 밀수품들이 외항선원에 의해 묵호 시내로 몰래 들어와 선주나 화주들을 유혹했어.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람 중에, 당시 이 밀수품 장사를 해 돈을 많이 벌었지. 발한천 나무다리(현재 묵호신협 옆)에서 리어카 한 대 놓고 온갖 외제품을 취급한 <깡통박> 이란 사람이 유명했지. 또, 정보 쪽에서 일하던 제대병들은 소위 <가방쟁이> 장사를 많이 했어. 이들은 <나포리 다방>이나 <등대다방>으로 다니며 일대일 장사를 하거나 발한상가 가게를 쭉 돌며 팔다 남은 가죽점퍼, 삼단양산, 간스매, 라이터 등을 강제로 맡기고 수금은 나중에 와했지."

묵호 발한삼거리 포장공사, 사진_동해문화원 DB

김두조 씨는 마치 파노라마 보듯이 그 시절을 회상했다. 해방이 되자 정어리공장과 염전이 철거되고, 그 공터에 상설 난전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37년도부터 시작한 묵호항 축조공사에 참여한 1세대 전입자들은 공사가 끝나도 묵호를 떠나지 않았다. 명태, 노가리, 꽁치, 오징어가 엄청나게 잡히자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일거리를 찾아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시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남쪽 마을인 천곡, 송정, 북평 일대 사람들은 당말재(동해초등학교 앞길)나 철로를 따라오고, 북쪽의 망상, 초구, 만우, 괴란, 옥계 사람들은 농산물을 지게나 머리에 지게나 이고 사문재를 넘어왔다. 농사짓는 것보다 장사라는 게 더 큰 이문이 남자, 아예 장삿길(주로 망상, 옥계 사람들)로 나서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들은 전문 상인들과 뒤엉켜 해변가는 날로 복잡해졌다.


바닷가가 점점 더 난장판이 되자. 관에서는 길 건너 발한천 옆으로 시장을 이전할 것을 종용했다. 상인들도 이에 동의해 땅을 분양받아 하나 둘 점포를 짓기 시작한 게 지금의 동해중앙시장(2013년 독도 가는 길목, 동쪽바다 중앙시장으로 개명)이다.


묵호항은 날이 갈수록 수많은 어선 선원, 어판장 종사자, 화물선 하역꾼, 선적 종사자들로 들끓었다. 또, 해방 직후(1946년)부터 동해안을 지키는 해군경비부 묵호기지가 생겨, 산뜻한 제복의 해군들을 늘 볼 수 있었다. 발한삼거리를 비롯한 시내에도 항상 사람들이 넘쳐났다. 더구나 명주군 장병 소집일을 앞두면 많은 젊은이가 묵호에 몰렸다. 장병 소집 집합소가 묵호역 앞(현 동해프라자 자리)에 있어 많은 입대자들이 몇 달 전부터 묵호에 와 젊음을 구가했다. 묵호는 일자리가 넘쳐났기에 맨손으로 와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징어잡이 배에서 선원을 찾고, 하역장에서는 막일꾼을 찾았다. 그들은 작정한 듯 몇 달을 그렇게 돈을 벌어 유흥가에서 흥청망청 쓰고, 영화관(동호극장, 묵호극장, 문화극장)에서 마음껏 영화나 쇼를 보다 입영열차를 탔다.

묵호극장 1960년대, 사진_동해문화원 DB

문을 삐죽이 열어놓고, 선풍기를 약하게 튼 전영수(남, 67,2013)씨가 깜빡 잠이 들어 있었다. 인기척에 눈을 뜨며 <그렇지 않아도 손님이 없는데 덥기까지 하니 더 그렇지 뭐!>라며 말하더니, 꿈까지 꾼 것 같다며 멋쩍게 웃었다. 50여 년 전, 그는 강릉에서 묵호로 이사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꼭두새벽에 듣는 리어카에서 나는 소리였다고 한다. 통행금지 해제(새벽 4시) 사이렌 소리가 나기 무섭게 어판장에서 오징어를 가득 싣고 출발한 리어카 대열이 집 앞을 지나가면, 노래의 반주 같은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리어카에 붙인 판자가 비포장길에서 부딪히며 내는 오묘한 소리였다.


"묵호로 이사 온 게 64년도인데, 운 좋게 발한상가 거리에 작은 가게가 나서 시겟방을 차렸어요. 그때만 해도 묵호 경기가 최고였어요. 밤만 되면 삼거리 삼일장 옆에 있었던 <오동나무집>에서 구워대는 노가리 냄새가 진동했어요. 많은 사람이 그 집으로 몰렸어요. 시내 중심가에 있었고 술도 저렴한 막걸리만 파는 데다, 안주도 철 따라 노가리, 꽁치, 양미리 등을 탄불에 구워 팔았지요. 꽁치 철이 되면 묵호역 옆에 포장마차 수십 군데에서 연탄불에 꽁치를 구워서 술안주를 팔았어요. 기름이 잘잘 흐르는 꽁치를 들고, 살을 한 입 물고 당기면 벼가 쭉 빠졌어요. 배고프던 시절, 어머니는 그 꽁치 살이 꼭 입쌀 같다고 했어요. 그래선지 그걸 먹으면 배가 든든했지요.


묵호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일은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불기 무섭게 안묵호 어판장에서 수십 대의 리어카가 줄지어 지나갔어요. 그때만 해도 비포장도로인데, 날 오징어나 노가리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향로동, 부곡동, 대원사 쪽의 덕장이나 건조공장으로 갔어요. 리어카 수십 대 지나가면 그 뒤로 지게꾼들이 바수쿠리(싸리나무로 만든 소쿠리)에 물이 뚝 뚝 떨어지는 오징어, 노가리, 명태를 지고 뒤따랐지요.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콤코무리한 오징어, 노가리 냄새에다 검은 탄가루가 풀풀 날리는 게 당시 묵호였지요.


묵호 천주교 밑의 영풍상사는 노가리를 건조해 파는 회사였는데, 날씨가 습할 때는 창고 주변에 벌레가 기어 다니고 썩는 냄새가 진동했어요. 주민들이 항의하자 단맛이 나는 살충제를 치고, 죽지 않은 벌레를 일일이 잡아 없앤 다음, 햇볕에 말려 팔았지요.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사장은 <이 살충제는 벌레만 잡고 인체에 해가 없는 약>이라 고래고래 소리 질러댔어요. 지금 생각해도 당시 노가리를 안주로 전국에서 맛있게 잡수신 술꾼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어쨌든 노가리 먹고 죽었단 애기는 없었으니 다행이고, 당시 묵호 경기 하난 좋았지요. 나도 그 덕에 일주일에 한 번씩 송정에 있는 비행장에서 비행기 타고 서울로 가서 물건을 해 밤기차로 내려왔을 정도였죠."

발한삼거리, 백화원자리, 사진_동해문화원 DB

당시 손목시계 하나 가격이 1,500원이었다. <오리엔트>와 <시티즌>이 인기였는데 중학교 한 반에서도 한두 명 찼고, 술집에서 술값이 없으면 시계를 맡길 만큼 귀했다. 오징어 배만 500척이 넘을 정도였으니, 선원들은 방수시계가 나오자 너도나도 시겟방에서 하나씩 사서 왼쪽 팔에 차고는 <이 시계, 골아 죽어도 방수야!> 하며 자랑했다. 그러나 돈이 많은 선주, 화주, 점주, 선장, 대리점 소장들은 금딱지 붙은 필수 시계를 더 좋아하기도 했다.

참고문헌_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묵호,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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