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브런치스토리로 떠나는 동쪽여행
짧게 생을 마친 송정 갯목 출렁다리!
1970년 6월에 창립된 북평청년회의소는 첫 사업으로 전천 하구 갯목에 <출렁다리>를 놓기로 했다. 회원들 모두 십시일반으로 시멘트, 철근, 레일, 폐침목, 나왕, 와이어로프, 그리스 등을 구해오고 노력 동원으로 멋진 출렁다리를 세웠다. 이는 당시 인기던 해수욕장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추억의 장소였고, 지역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했다. 결국 이 사업으로 북평 JC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세계총회에서 '지역사회공헌분야'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러함에도 출렁다리는 안타깝게 이듬애 대홍수 때, 그만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고 지금은 기초 구조물만 갯목 남측에 남아있다.
송정 바닷가에 사람들이 갑자기 모이는 경우가 몇 가지 있다. 넓은 백사장, 순식간 해변에 나타나는 고기떼를 잡는 후리어업 일과 갯목(전천 하구) 일대에 모래가 막혔을 때 등이다. 가뭄이 들거나 해일이 지나간 후에는 바닷모래가 빈번하게 전천 하구의 물줄기를 막아버렸다. 전천 물이 바다로 흘러가지 못하면 송정 농민들이 제일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송정 앞들에 있는 양어장, 부들밭, 웃섬, 딴섬, 앞섬, 화랑개, 손목 일대의 밭이 물에 잠겨져 버리면 난리였다. 용추폭포와 백봉령에서 내려오던 물이 끝자락에서 막히면 결국 앞들에 고이는 수밖에 없었다. 북평 쪽으로는 제방둑과 구미산 자락이 있지만 송종은 그냥 허허벌판이었다.
갯목은 거대한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지고
조용한 송정에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종대에서 울리면 사람들은 불이 난 줄 알고, 코를 실룩이고 연기부터 찾았다. 불난 곳이 보이지 않으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삽이나 괭이를 들고 갯목으로 냅다 뛰었다. 앞들에 일하던 사람들이 소방대에 신고했으니, 당연히 그들이 제일 먼저 도착했다. 뒤이어 사이렌을 울린 의용소방대원들이 출동했다. 불이 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듯이 갯목의 모래 제거 작업도 혼자 할 일이 아니었다. 어른 키 넓이로 흐르는 물줄기는 민물장어처럼 거세게 흘렀기 때문에 소방대원들은 모래펄에서부터 인간띠를 해, 끝 대원의 허리춤에 밧줄을 묶어 연결했다.
마지막 대원은 재빨리 모래 둑에 삽질을 해 물꼬를 텄다. 둑이 거센 물줄기에 무너지기 시작하면 무조건 튀어야만 했다. 괜히 미련스럽게 논둑 만들듯 삽질하고, 인간띠에 의존하지 않다가는 큰 물살에 휘감겨 바다로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모래 둑이 떠내려가고 물살이 약해지면 갯목에 모인 사람들은 물 밑의 모래를 퍼 백사장으로 날랐다. 십시일반의 힘으로 하는 일이라 큰 성과는 없었지만, 대부분 사람은 시원하게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만족해했다. 물꼬를 튼 의용소방대원들도 서로 격려하며 제자리로 돌아들 갔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되면 물꼬 트는 일은 봄까지 중단되었다. 그 덕에 갯목일대는 넓은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지곤 했다. 당시 '외발시게또(일본 언어)'를 타고 화랑개며 앞섬과 갯목을 누볐다는 최지영(남, 71) 씨는 자랑했다.
외발 시게또의 추억
"지금은 전천에 바닷물이 올라와 한 겨울도 잘 얼지 않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갯목 일대가 전부 얼름판이었어요. 저 멀리 봉정, 귀운, 이도리, 북평 애들까지 전부 시게또를 타려고 갯목까지 올 정도였지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외발 시게또>는 얼음 시게또 고수들의 필수품이었지요. 송정 쪽 전전 하구에 있던 앞섬 일대는 둑이 있어 얼음 높이가 달랐어요. 멀리서 보면 한 얼음판이지만 실제는 높낮이가 달랐지요. 북평 애들이 우리를 다라왔는데, 그냥 미끄러져 자빠지기 일쑤였지요. 우리는 울퉁불퉁하고 높이가 다른 얼음판에 익숙했지만, 그 애들은 그 상황을 몰라 늘 자빠질 수밖에요. 송정의 얼음썰매 소고수들은 곡예사처럼 요리조리 무릎을 틀어 신나게 송곳침을 얼름에 꽂으며 달렸지요. 갯목의 출렁다리에서 놀던 때와 <외발 시게또>를 타던 그때가 그립네요."
참고문헌_이야기가 있는 송정,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