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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y 03. 2023

향기로 마시는 술, 송정막걸리

37.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향기로 마시는 술, 송정막걸리

송정막걸리는 동해 송정에서 3대째 73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일반 막걸리 보다 1도 높은 알코올 도수의 깔끔하며 세련되고 도회적 맛<허시명 술 평론가 어록>을 자랑하는 노포 막걸리다. 우리 전통주와 막걸리는 향기로 마셔야 막걸리 맛이 깊다고 한다.


막걸리에 대한 일화 중에 경북 영주에 살았던 한 실향민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주역 앞에서 평생 지게꾼으로 살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말 때문이었다. 그의 가족은 6.15 때 이북에서 피난 오면서 아버지가 '만약에 우리가 어찌하여 헤어지게 되더라도 영주역에서 다시 만나자.'라 여러 차례 말하곤 했다. 서울까지는 가족 모두 헤어지지 않고 왔는데, 한강다리가 폭파되면서 10살 된 그는 부모와 헤어지게 되었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 이곳저곳 다니면서도 <영주역>이란 말을 잊지 못했다.


몇 해 만에 묻고 물어 찾아온 '영주역'은 가족 중 누구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배가 고파지자 역 앞에 있는 양조장에서 술찌개 미를 얻어먹고 허기를 면했다. 그는 늘 배가 고파지면 양조장으로 가서 술찌개미를 얻어먹고, 역 앞에서 가족을 기다리다 자연스럽게 지게꾼이 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한 게 없었다. 단지, 지게가 리어카로 변하고, 술찌개미가 <막걸리 한 되>로 변했을 뿐이었다.


그는 <막걸리 한 되>를 한 번에 마시지 않고, 배가 고파지면 대접으로 한 잔씩 마시는 게 철칙이었다. 그렇게 밥 한 숟가락 먹지 않아도 그는 다른 동료들처럼 지게에 짐을 싣고 거뜬히 일어났다. 병원 한 번 가지 않고 멀쩡하게 살자, 주위에서 여자를 소개해 준다 해도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결혼은 부모 찾은 후에 해도 늦지 않다며 오직 영주역만을 지켰다. 어쩌다 큰 짐을 맡아 힘을 쓰는 날은 저녁에 잔치국수 한 그릇을 더 먹을 뿐, 밥은 언감생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부모, 형제를 만나 따뜻한 밥과 진수성찬을 대접할 때까지 막걸리만을 먹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영주역을 찾는 사람들은 막걸리 한 되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를 천연기념물 대하듯 했다. 그도 늘 흥에 겨운 사람처럼 웃으면서 손님들에게 우스갯소리를 하며 짐을 날라 주었다. 그렇게 50년 넘게 영주역을 지키던 그가 어느 추운 겨울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방에는 1억이 넘는 돈이 예금된 통장과 도장이 있었고, <이 돈을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해 써주세요>라는 메모지가 발견되었다.

이야기를 들려준 분은 전윤만(남, 76, 2020)씨다. 그는 평생을 도계, 송정, 옥계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다 2015년 즈음 은퇴한 후, 용정동으로 이사해서 텃밭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그가 막걸리에 얽힌 이야기를 이어갔다.
막걸리는 '흔들어 마셔'야 합니다.

"영주역 지게꾼 이야기는 영주에서 양조장을 하는 친구가 들려줬어요. 막걸리가 단순히 술만이 아니라 사람이 버틸 만큼의 에너지와 영양가도 들어 있는 양식의 하나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요즘 젊은 분들이 막걸리 마실 때 보면 병을 흔들지 않고 위의 맑은 청주만 잔에 따라 마시더라고요. 이건 알코올만 마시는 것이지요. 막걸리의 각종 영양가는 가라앉은 뻑뻑한 부분에 있거든요. 막걸리를 동동주라 부르는 이유는 쌀과 관련이 있어요. 80년대 중반까지 논 쌀이 귀해 주로 수입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었지요. 쌀은 귀하고 비싸서 시람 먹을 것도 없는 처지라 나라에서 쌀로 술 빚는 걸 허락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통일벼도 나오고 수입쌀이 늘자 쌀로 술을 빚어도 된다는 정부허가가 났어요. 정말로 술을 잔에 따르자 몇 쌀알이 동동 뜨자 <동동주>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번지게 되었지요. 그런데 쌀로 만든 술을 상큼한 맛이 나고, 밀가루는 텁텁한 맛이 나요. 지금은 100% 쌀로 만 만들지만, 애주가들 기호를 맞추기 위해 쌀 70%, 밀가루 30%로 만들어 나름 술맛을 내는 양조장도 있었지요.


막걸리는 물맛이 중요하다. 석회분이 있는 땅과 황토분이 있는 땅에서 나는 물은 맛이 다르지요. 물이 좋아도 쌀을 잘 씻어야 하고, 정성 들여 찌고, 잘 식히는 게 중요하죠. 예전에는 사카린, 아스파탐, 미원 등 맛을 내는 감미료를 양조장마다 조금씩 넣어 맛을 다르게 했죠. 쌀은 뽀얗고 밀가루는 말갛게 색이 나지요. 결론은 사람 먹는 음식이라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막걸리는 옛날부터 서민 술이잖아요. 특별한 안주가 필요하지 않고 김치 한쪽, 소금 몇 알이면 멋진 안주 아닙니까?. 이에 비해 소주, 정종, 맥주, 양주는 특별히 마련한 안주가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나라 서민의 술인 막걸리가 날이 갈수록 다른 술에 밀리는 게 안타까웠어요."

송정막걸리축제 Ci, 디자인_가톡릭관동대학교 최종관 교수
2019년 제1회 송정막걸리 축제 개최

당시 국민청원에 의해 <막걸리 빚기>가 국가지정 문화재가 준비되던 시기 동해에서는 지역막걸리 주제로 축제가 개최됐다. 평소 송정막걸리를 좋아하던 필자와 애주가 지역 MBC출신의 홍순구 선배와 선 후배 10여 명이 송정막걸리 팬클럽을 만들고 막걸리를 판매하는 전문점을 순회하며 정기모임을 개최했죠. 그러던 어느 날 필자가 제안을 합니다. 솔 숲이 아름다운 송정 솔밭에서 송정막걸리 역사와 정신을 전승하는 막걸리 축제를 개최하면 어떨까? 라고 했더니 회원들은 모두 좋아했다. 나중에 이 이야기가 당시 송정동주민센터 이정희 동장에게 알려지고 동장은 미팅을 통해 동 대표행사로 하자고 제안해 왔다. 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원주민 원 기획자 내몰림 현상)만 막아주면 막걸리 축제로 개최해도 좋다고 의견을 모았다.


때는 2019년 9월이다. 평소 청년기획단 활동에 참여한 후배들과 대학생, 지금은 체육학 박사가 된 김나경씨를 비롯한 시민 참여 MSG(막걸리 서포터스 그룹)이 함께 참여해 축제를 준비했다. 필자는 기획과 총감독으로 참여했으며 고생도 엄청했다. 첫 축제는 송정동 마을 축제로 큰 성과를 올렸다.

초청가수, 제이모닝 LIVE!
축제 인파, 개막 전 준비 막걸리 소진

지금은 도시재생에 종사하는 석서영 코디의(당시 현장감독) 제안에 따라 대학축제 분위기로 개최해 시민은 물론 언론에서도 큰 호응을 받았다. 송정의 키워드 10개를 찾고 그중에서 킬러콘텐츠를 <송정막걸리>로 선택한 이 축제는 아쉽게도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코로나도 있었지만 결국 1회 행사가 끝나고 원 기획자와 감독은 물러나게 되고 마을 스스로 진행되고 있다. 기획자 입장에서 바람이라면 <영동권 문화의 중심, 송정의 가치와 3대째 이어오는 송정막걸리의 정신을 잘 이어가는 열린 생각>이 필요하다고 전하고 싶다.


또한 그 상황도 시대상황이 반영된 한국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축제를 준비하던 시기에 필자는 <위크앤드 막걸리 야시장> 상설 개최를 제안했다. 야시장에 문화를 담아 사람이 북적이면 절로 거리 빈집들은 막걸리 주점이 들어서게 되고 결국 송정은 유명한 막걸리 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1회성 축제도 중요하지만 특징 있는 상설 야시장은 지속적인 운영이 담보된다면 새로운 문화존 형성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송정막걸리 축제, 막걸리 토크쇼(허시명 술평론가)
1950년대 해병대를 제대한 직후, 부친(임국빈)이 물려준 송정양조장을 운영했던 임기훈(83, 남, 2020)씨가 당시 앙조장 관련된 비화들을 들려줬다.

"부친은 전쟁 막바지인 1951년 송정양조장을 열었어요. 집이 도계 소달면이지만 이곳에 차린 이유는 삼척산업(현 DB메탈)과, 삼화제철소, 북평역이 있었기 대문이지요, 이곳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이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는 데다 매달 월급을 받으니, 소비량이 많으리라 판단한 거지요. 송정시장 입구(시장길 13)에 지하수를 파고, 궁촌에서 술독을 구입하고, 서울에서 기술자를 찾아 데려왔어요. 기술자는 서울에서 곡자(누룩) 회사에 근무했는데, 한 달치 누룩을 기차에 싣고 왔어요. 귀한 맵쌀로 꼬드밥(고두밥)을 해서 막걸리를 만들었는데  세무서에서 일일이 가격이나 운영 등을 참견했어요.


당시 북평읍에 <북평양조장>, 과 <삼화양조장>, <송정양조장>이 있었는데 양조장마다 1/3 지분을 갖고 판매를 전담하는 공동 공판점을 차려 통합운영을 했어요. 나는 성격상 부친과 달리 사업에 애착을 갖고 전적으로 매달이지 못했어요. 막 제대(1959)를 한 터라 밖으로 친구들 만나고 놀러 다니고 싶었어요. 그러니 직원이 5명이 되지만 운영일체를 지배인엑게 맡겨, 양조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관심했어요. 단지, 북평장이 되면 미전에 가서 싸을 사 오는 일만큼은 철저하게 했어요. 살기 어려운 친구들이 내가 장날마다 쌀 사 오는 걸 알자, 어느 날 찾아와 배고픈 사정을 토로하며 쌀을 좀 달라고 했어요. 나는 도와줄 방법을 궁리하다, 통행금지 사이렌이 불면 공장 창고 문을 열어놓겠다고 했어요., 이때 친구들이 들어와 드럼통 10개에 담아놓은 쌀을 골고루 한 바가지씩 퍼 가라 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술 담그는 날이 되면 쌀 5 가마씩 물에 씻어, 10 드럼에 나누어 넣고, 저녁에 물을 뿌려 넣었거든요. 친구들은 웬 떡이야! 하며 쌀을 퍼갔지만, 문제는 세무서 직원에게 들켜버렸어요.


알코올 도수가 최저 5.6도가 나와야 하는데, 미달인 5.4도밖에 안 나와 애주가들이 세무서에 <송정막거리가 싱거워 못 먹겠다.> 라 신고를 했어요. 그러자 세무서 직원이 공장에 찾아와 <전과 같은 쌀 양으로 술을 빚는데, 왜 도수가 안 나오느냐?> 라며 추궁했어요. 나는 <아니, 술이 싱거우면 더 마시면 될 것 아니요? 그리고 사람보다 술이 더 중요하다는 거요?>라 대꾸했어요. 그러자 그 세무서 직원은 고개를 흔들며 <여러 양조장 다녀봤지만, 사장님은 장사꾼 자격이 없네요!>라 말하며 돌아섰어요.


세무서 직원의 집요한 추궁에 결국 지배인이 쌀 부족분 대신에 물을 더 탔다고 실토를 하자, 나의 쌀 기부는 중단되고 말았지요. 또, 60년대는 지역마다 양조장 술을 판매하는 공판장 제도가 엄격했어요. 나라에서 재정 수입이 적다 보니, 세수가 좋은 양조장을 엄격히 관리했어요. 양조장의 판매량을 늘 조사하고, 각 가정에 담그는 밀주를 단속했어요. 판매량에 비해 입금이 적으면 관리자가 직접 나서 외상값을 받아 내거나, 판매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태만했어요. 이러다 보니 술은 전처럼 출하되는데, 입금은 안 되고 외상장부만 자꾸 늘었어요.


나보다 더  애가 타는 이가 세무서 직원이라 자주 양조장에 와서 추궁했어요. 나는 어느 날 일을 저질렀는데, 바로 외상장부를 아예 불에 태워버렸어요. 세무서 직원도 근거 자료가 없으니 세금을 매기지 못하고, 결국 나만 손해를 입었지요. 나는 실속 없이 양조장을 운영하는 데다, 돈 쓸 일이 생기면 아끼지 않았어요. 삼척시 재향군인회장 일을 떠맡았는데. 오십천 옆의 충혼탑을 세우자는 결의를 했어요. 그런데 기금이 모이지 않고, 다들 나만 쳐다보기에 양조장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탑을 건립했어요. 나와 맞지 않은 <송정양조장> 운영을 결국 포기하고 1975년 <도계양조장>을 운영하는 전영태 씨에게 양조장을 넘기고 말았어요. “

1970년대에 동네에 상을 당하면 술 담당을 했다는 김영남(여, 68,2020)씨는 재미났던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봉정 동네에 상가댁이 생기면 보통 오일장이나 칠일장을 했어요. 각 집마다 부조응 했는데 글을 하는 집은 만장을 써오고, 대부분 집은 감주와 술을 담아 왔어요. 보통 집안에서 술을 담그면 오일에서 칠일정도 걸리기 대문에 요즘처럼 삼일장을 하지 못했다고 봐야지요. 당시 마을회관인 공화당에서 양조장 막걸리를 팔았는데, 담당자가 상갓집의 손님을 예상해 미리 양조장에 주문을 해요. 그런데 예상보다 술이 적게 팔리면 세무서 직원이 슬쩍 밀주 단속을 나와 동네를 돌며 귀신같이 술 단지를 찾아내요. 우리 모친도 술을 잘 담갔는데, 한 번은 직통으로 밀주단속반에 걸렸어요. 보통 마을 입구에 사는 집에서 단속반이 나타나면 신호를 보내 전 마을로 금방 퍼졌어요. 이걸 알고 그날은 단속반이 마을 뒷산으로 해서 지름길로 오는 바람에 미처 술 단지를 감추지 못했던 거지요. 그래서 금쪽같은 벌금을 냈다고 모친이 무척 서운해했어요.


상갓집에는 판포, 그릇, 상, 상여, 술 담당으로 나누었는데 나는 주로 술 담당이었어요. 양조장 술과 밀주를 같이 놓고 섞기고 하고, 번갈아 가며 주전자에 퍼 담아 내주었어요. 박판에 술이 모자랄 것 같으면 막걸리에 됫병 소주를 타서 상객들을 빨리 취하게 했어요. 그런데 다수 상갓집은 오일장이 지나면 막걸리가 남아요, 술이 쉬기 시작하고 시큼한 냄새가 집안에 진동하면 남은 막거리를 솥에 붓고,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복판에 작은 단지를 놓아요. 그리고는 불을 지피는데, 술이 끓으면서 알코올이 솥뚜껑 꼭지에서 바닥의 단지에 똑똑 떨어져요. 고량주처럼 도수가 높아, 불을 붙이면 파란불이 붙을 정도였어요. 많은 집들은 이 술로 과일주를 담갔는데, 덜 익고 맛이 없는 돌배주를 많이 담갔어요. 또, 산으로 다니며 복분자, 땡삐, 더덕, 도라지 등을 발견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채취해 고량주에 푹 담갔다가 한 잔씩 마셨지요.


장사를 지낼 때나 잔치, 제사, 명절이 아니라도 집집마다 늘 술을 담갔어요. 모내가, 보리베기, 산매기, 영등제, 안택을 지낼 때마다 술을 담았지요. 쌀이 없으니 주로 보리쌀을 씻어 쪄서 말렸다가 단지에 누룩과 물을 넣어 삭히지요. 누룩은 시간 날 때 밀을 방앗간에 가서 태겨, 물을 살짝 뿌리고 둥글게 발로 <뽀다하게> 밟아요. 이때 복판은 젖지 않게 하고 방바닥에 볏짚으로 깔고 띄우거나, 누룩을 천장에 매달아 만들어 두지요. 술 담글 때 이 밀기울 누룩을 잘 부수어 찐 보리살과 같이 넣어요, 막걸리 안주는 주로 김치, 깍두기나 생채가 전부이고 모내기 때는 메밀묵이나 분추, 쪽파를 넣고 적전을 만들어 양념간장을 만들어 나가곤 했지요."

송정막걸리, 사진_ 송정막걸리 홈페이지
참고문헌_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동해,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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