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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y 02. 2023

물이 마르지 않는 '비천飛川'마을!

36.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비천계곡에 물이 마르면 동해는 가뭄!

<비천>이란 마을은 동해에서 임계와 정선을 넘어가는 방향으로 삼화를 지나 신흥마을에 진입하기 이전 우회전 하면 마을이 나타난다. 비천 이름의 유래는 모두 물과  관련이 있다. 산이 많고 들판은 좁아 마을이 냇물 옆에 있다 하여 물가 빈을 써서 빈내濱內라 불렀다. 좁고 경사가 심한 계곡으로 물이 흐를 때, 바위에 부딪혀 빛이 난다 하여 빛내가 빈 내가 됐다. 다른 일설은 마을 입구에 있는 직소直沼에 물이 떨어질 때 폭포처럼 빛이 난다 하여 '빛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했다. 이 '빛내'를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광천光川, 빈천濱川, 빈내濱內, 비천飛川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지금도 비천 사람들은 '우리 마을에 물이 마르기 시작하면 동해시 전체는 벌써부터 가뭄이 들었을 것이다.'라 주장했다.


기록에 의하면 비천마을 처음 입촌한 성은 조선 숙종 때, 곡부 공曲埠孔 씨였다. 그 후 정 씨, 영 씨, 김 씨, 배 씨, 전 씨, 진 씨 등이 터를 잡았다. 잘 조성된 마을 길을 언제부터였을까? 2002년 태풍 루사가 온 산하를 할퀴고 지나간 후였다. 그전에는 리어카나 우마차도 지나지 못하고, 계곡을 따라 돌다리를 건너고, 논물 대는 도랑길이나 논두렁으로 달방마을까지 나갔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온마을 사람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길을 넓혔다. 그 후 석산 발파로 돌을 싣고 가기 위해 솔밭까지 길을 넓혔을 뿐이다.

비천 토박이인 양희장(남, 61)씨가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게 1978년 봄이었어요. 그전까지는 등잔불이나 호롱불로 밤을 밝혔지요. 촛불도 제삿날이나 켤 만큼 귀했지요. 학교에서 거리가 먼 웃빈네, 장재터, 더랭이골, 사기점, 참나무재, 가래터(갈전), 초록봉에 사는 아이들은 꼭두새벽에 밥을 먹고 등교했지요. 그래서 학교 옆에 사는 아이들보다 늘 먼저 등교했지요. 학교 옆에 살았던 나도 밭에 나가는 어머니가 차려준 새벽밥을 먹었지만 늘 지각을 했어요. 배는 부르고 날은 아직 새지 않아, 잠깐 눈 붙이다 일어난다는 게 그만 깊은 잠이 든 탓이지요. 중, 고등학교 다닐 때는 비가 조금만 강하게 내려도 등교할 생각을 못했지요. 솔밭 및 성황당 앞의 돌다리가 급류에 잠겨 내를 건널 수 없었어요. 선생님도 큰비가 내렸다 하면, 비천에서 다니는 학생들의 결석을 당연시했지요. 60세가 넘은 다수의 선배 분들은 30리가 넘은 길을 걸어서 학교로 다녔지요. 50대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집까지 오는 길이 험해 거상마을(달방) 입구 친척집에 보관했다가 타고 다녔지요. 예전 비천 집들은 거의 다 굴피집이나 초가집이었어요. 부엌과 외양간이 붙어 있어 소여 물을 삶는 가마솥이 부엌에 있었어요. 사랑방엔 작은 동창東窓이 나 있었고, 안방 한쪽 모서리에 있는 코쿨 <사람 코 닮은 벽난로> 옆에서 어머니들이 길쌈을 하거나 바느질을 하셨지요. 전기가 들어온 후 집집마다 있던 디딜방아가 없어졌지만 가래터에 사는 배선희 댁은 아직도 살아남았어요."

비천분교 운동장, 비천을 담다. 사진_조연섭

비천은 비천분교를 중심으로 윗빈내와 아랫빈 내로 나눈다. 윗빈내는 비천의 주산인 매봉산 아래에 있는 가래터이다. 가래터는 무릅재 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한 때는 40여 가구나 살았던 큰 동네였다. 사기점말은 매봉산과 초록봉의 중간쯤에 있고, 예전은 사기를 구워 팔았다. 삼척 군 지에 <사기점 마을에는 사기를 많이 제조하여 수입이 많았지만 1910년대에 없어졌다.> 라 기록했을 정도였다. 장재터는 남원 양 씨 재실인 <광천재光川齋>에서 쇠쟁이골과 더랭이골로 올라가는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김희숙(여, 58)씨가 천연염색 작업실을 운영하던 공방 방향에서 좀 더 들어가 있는 마을이 윗빈내이지요. 양 씨 집성촌이었어요. 예전은 30여 가구나 살았는데 이젠, 달랑 3 가구만 남고 다들 외지로 떠나갔어요. 비천은 골짜기가 많았고 골골마다 넓지는 않았지만 논밭이 꼭 있었어요. 게다가 물이 마르지 않으니, 식구들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면 이 밥(쌀밥)도 먹는 데가 비천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그래요. 또, 마을은 산이 많아 집집마다 소 두 마리 이상을 기본으로 길렀답니다. 집안의 목돈이 들 땐, 이 소를 팔아 충당을 했지요. 그 결과 많은 집들이 자식들을 고등교육을 시킬 수가 있었지요.

비천계곡 3월의 눈, 사진_조연섭

매봉산 아래에 있는 망전골에 금광이 있을 정도로 금이 많이 났다고 그래요. 비천 사람들은 추수를 끝내고 용돈을 벌고자 사금을 채취했대요. 5, 6년 전에 임도를 닦느라 금광 터가 지금은 묻혀 버렸지요. 묵호에서 오징어와 명태가 한 창 날 때, 덩달아 덕장에서 쓰는 장대나무도 엄청 필요했지요. 비천과 신흥사람들이 이를 알고 지게에 지고 가 팔았어요. 비천분교는 1954년도에 설립됐는데, 당시 북평읍에서 유일한 분교였어요. 1993년도에 폐교되었지만 그 시골에서 29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어요. 운동회가 열리는 날은 동네잔치나 다름없었어요. 집집이 먹을거리를 한 보따리씩 싸와 학생들이나 마을 주민이나 풍성하게 하루를 보냈지요. 소풍은 주로 달방마을을 지나 이기리로 갔어요.


가을 소풍 때 낙엽송 잎이 떨어진 푹신푹신한 오솔길을 걷다가 <미역놀>이란 계곡에서 재미나게 하루를 보냈지요. 매주 주말 고향을 갈 때마다 폐교된 모교를 찾아요. 지금은 커피 체험장 <비천을 담다.>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몇 년 전까지는 비천분교를 임차해 운영하던 선생들이 주관하는 <산골음악회>가 가을밤에 꼭 열렸어요. 관중이 주차한 차량행렬이 마을입구까지 이어질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였지요. 이 프로그램은 훗날 삼척 MBC(지금의 MBC강원영동)의 인기 음악회 프로그램 <산골음악회>를 탄생시키면서 이 프로그램은 전국방송으로도 편성될 만큼 주목받은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고목이 된 비천분교 산벚나무는 1973년(4회 졸업생 연도) 식목일에 심은 나무들이지요. 학교 갈 때마다 폐교된 모습이며 고목이 되어가는 벚나무며, 텅 빈 마을 모습이 나이 들어가는 나와 비슷해 애잔한 마음이 들곤 하지요."

산골음악회, 사진출처_하이원리조트

아랫 빈 내는 양 씨 재실인 광천재와 비천분교 일대를 중심으로 아래쪽 마을을 가리킨다. 조금 내려가면 성황당이 있는 솔밭과 김지터(감자터), 석산, 찍소가 나온다. 광천재 오른쪽 골짜기로 가면 무릅재, 승지골, 망상 만우 마을이 나온다. 비천분교 옆으로 난 골짜기를 올라가다 왼쪽이 큰 지조골, 오른쪽이 작은 지조골이다. 신흥과 비천 사람들은 이 큰 지조골로 묵호시장으로 다녔다. 이 두 골의 복판길로 가면 초록봉이 나온다.


예전부터 '제주도 빼놓고 팔도사람들이 조상 산소를 비천에 서로 쓰려고 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당이 많았다. 봄가을 전사 철이 되면 길에는 사람이 없는데, 산에 가면 종중 사람들이 그득했다. 많은 산소 중 단연 으뜸은 비천분교 위쪽의 증개밑등(증개는 정가의 음 변화)에 있는 포은 정몽주 6 세손 산소인데, 쇄운리로 이장하였다. 또 하나는 찍소 앞산에 '영일정 씨 부사공파종중묘원'이 있는데, 강릉부사를 지냈던 정두형의 묘이다. 이 묘지에 조선시대의 4대 명필(안평대군, 이용, 김구, 양사언)의 한 사람인 봉래 양사언이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강릉부사에 재임 중, 전임 부사인 정두형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묘지에 들렀다. 봉래는 말을 타고 오르려 했으나 워낙 경사가 심해 친히 걸러 올라갔고, 묘지 앞에 일산(햇볕을 가리는 큰 양산)을 세웠다는 <일산 등>이 있다. 전사 날이 되면 영일 정 씨 후손들은 쌀 한 가마니로 떡을 하고, 큰 돼지 한 마리와 온갖 해물과 과일로 제수를 차려 산소로 갖고 왔다. 묘지 앞에 큰 차일을 치고, 길이가 다섯 자가 넘고 두께가 한 뱀 반인 커다란 상석에 제물을 진설하고, 수많은 종인들이 참석해 집례의 홀기에 따라 절을 했다.

매일 아침마다 장재터에 있는 밭에서 지내다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김형준(남, 68)씨를 만났다.
비천은 비밀의 땅, 동해시의 보고

비천계곡, 사진_조연섭

"저는 지역 요식업협회장과 사업에 수십년 종사하면서 늘 비천을 잊은 날이 없었어요. 요즈음은 새 쫓는 게 농사지요. 수수농사가 제일 쉽다 해 시작했는데, 저놈의 새들이 내 애를 바싹바싹 태울 줄 몰랐어요. 한의사인 동생이 저기 장재터에 있는 땅을 샀는데, 그냥 놀린다기에 내가 나섰지요. 농사는 처음이라 여기저기 물어 시작했는데, 장난이 아니라는 걸 겪고 있지요. 그런데 문득문득 허리를 펴 장재터의 산과 계곡을 돌아보면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지요. 나지막한 산에서는 온갖 새들이 날고, 계곡에서는 쉴 새 없이 맑은 물소리가 들리지요. 동생은 약초 재배도 하고 노후에 한가롭게 지낼 땅을 사려했어요. 3년 동안 영동지방 계곡이 있는 곳곳을 이 잡듯 찾았지요. 이 조건이 맞으면 저 조건이 안 맞고 그랬지요. 그래서 내가 <그런 땅이 어디 있노?>라 핀잔도 줬는데 , 결국 찾아낸 곳이 이 비천의 장재터이지요. 농사가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내년부터 여기에 작은 집을 짓고 아예 살 생각이지요. 비천은 동해시의 보고 임이 틀림없어요. 여기만큼은 개발이 생각이지요. 비천은 동해시의 보고임이 틀림없아요. 여기만큼은 개발이 없고, 자연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이 틀림없는 비밀의 땅, 비천이 틀림없어요."

참고문헌_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삼화,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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