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홍월평 <동해 삼화 무릉천 보洑를 막아 홍월보를 관개灌漑 한 농경지>과 홍두들은 같은 지역 두 이름이다. 홍월평은 올밭들 <일찍 매는 밭>의 한자지명 월밭, <월평>에서 나온 이름이다. 홍두는 홍도의 음 변화로 복숭아나무가 많던 들판이라 하여 홍도들, 홍두들, 홍도촌, 홍도리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이들 이름 중 토박이는 주로 <홍도리>라 불렀다. 이 마을은 <쌍용 C&E 동해공장>이 들어오기 전 부촌마을이었다. 마당에 나서서 내다보면 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마을이다. 거주는 주로 강릉 최 씨 집성촌으로 38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홍도리 일대 옛 모습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삼화 사람들조차 거대한 시멘트공장으로 변해버린 저곳에서, 십리장보 <홍두들>과 <홍도촌>이 있었다는 걸 잊고 산다. 그게 불과 50년 전이었다. 삼화 토박이 최준석(남, 80)씨는 홍도촌에서 조상 대대로 살면서 두 번이나 반경 500m 안쪽에 집을 새로 옮겨 지었다. 그의 현재 집은 쌍용 C&E 동해공장 정문과 사무실이 보이는 이로리 <동막골입구> 다.
3대가 홍도촌을 지켜온 삼화 토박이 최준석 씨는 기억한다.
"아버님(정암 최병희 1905~1986)은 집안의 생계를 위해 생업으로 한의원을 하셨지요. 늦은 연세(40세)에 내가 태어나자 호호 불 정도로 귀여워하셨지만, 예의범절 교육만큼은 철저했지요. 어른들 앞에서 밥 먹고, 절하고, 인사하고, 말하는 것까지 제대로 할 떼까지 지적을 해주셨지요. 좋은 약초 밭 때문에 이사했던 소달면 고사리와 도계에서 '장손은 종가를 지켜야 한다.' 라며 어린 나를 조부모님이 계시는 홍도리로 보냈어요. 증조부님은 목소리가 커서 가끔 울타리 너머 멀리 떨어진 중답마을을 향해 '여보게, 구멍 좀 뚫어 물 좀 내려 보내게!'라 소리치면, 금세 보에 물이 흘러 내려왔다고 할머님이 저에게 말씀해 주셨지요. 많은 사람이 지금 쌍용공장 부지에서 논농사를 수만 평 지었다고 말하면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어요. <보>가 있었다는 걸 미처 생각 못했던 거지요. 삼화천은 저 아래로 흐르고, 쌍용은 산기슭에 있기 때문이지요.
홍도리에는 유난히 복숭아나무와 감나무가 많았어요. 그리고 <홍돌버당(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은 잔풀이 많아 동네 소들이 하루 종일 풀을 뜯었지요.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아버님은 자전거를 한 대 사 주셨어요. 당시로는 엄청 귀했지요. 친구 들과 등하교 때 자전거 주위를 떠나지 않았지요. 책가방을 양 핸들에 걸고, 뒤 짐받이에 두 개를 포개 얹어 고무줄로 묶었지요. 친구들이 마라톤 선수처럼 뛸 폼을 잡으면, 내가 냅다 학교를 향해 페달을 밟았지요. 친구들도 질세라 땀을 흘리며 자전거 뒤를 따라왔지요."
최준석 씨가 대학 재학 중 입대했을 때 쌍용이 들어섰다. 조상 대대로 살았던 홍도촌 마을 전체가 사라져야 했다. 당시로서는 집이 헐리고 보상금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사장이 공화당의 실세인 김성곤 씨이고, 동양 최대 시멘트공장을 지어 삼화뿐만 아니라 국가기간산업으로서 대한민국을 잘 살게 해 준다는데, <우리는 이사 안 갈래요!>라 내세울 수가 없었다. 옛날 유명한 지관이 홍도촌을 지나다 <만석꾼의 땅>이지만 기가 센 곳이라 병치례가 잦은 곳이라 했다. 사람들은 <차라리 잘 되었다.>라는 심정으로 공장부지에 들어가지 않은 곳으로 이사했다. 한 가구 한 사람씩 쌍용에 취직할 혜택을 줬기 때문이다.
<최의원집>도 12칸 한옥을 축소해 삼화역 앞쪽으로 이전했다. 당시 최준석 씨는 근 복무 중이어서 숙부의 주도로 세간살이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골동품이며 사진 등 귀중품이 많이 분실되고 말았다. 최준석 씨가 제대하고 이사한 새집으로 왔을 때, 한숨만 나왔다. 하필이면 새집 위치가 쌍용 공장의 굴뚝 바로 및 일대(5통)였다. 당시는 집진시설이 미흡해 새벽에 마당으로 나가보면 눈처럼 돌가루가 부옇게 쌓여 있었다. 이사를 또다시 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4대 봉양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오염되서는 안 되었다.
당시 청년 최준석은 매일 아버님과 함께 새집 터를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아름말(죽림일대) 야산에 풍선을 띄우는 사람들을 발견했는데 , 그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남산의 야산 일대로 다니며 풍선이 어느 쪽으로 날리는지 조사했다. 사람들에 의하면 그들은 벌써 1년 가까이 계절풍 방향을 조사했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은 바람 조사를 해 돌가루가 날아오지 않는 곳을 찾는 중이었다. 간부사원과 독신자 사원들이 살고, 귀한 손님이나 본사 중역들이 숙식을 해결할 청정지역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로 2리 산 중턱에 사원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었다. 최준석 씨도 죽림마을과 동막마을 일대를 다니며 새로 옮길 집터를 물색했다. 결국 이로리 125번지 땅을 구매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조상의 혼이 깃든 목재를 그대로 옮기고, 집 형태도 그대로 살리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겨우 남향에다 넓은 마당, 한옥과 양옥을 접목시킨 집이 완성되었다.
"나도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당시 쌍용양회에 입사했죠. 내가 주로 맡은 업무는 대 관청 인허가 업무였어요. 30여 년 근무하다 퇴직한 후 뒤돌아보면, 그래도 고향을 위해 최선을 다한 일이 있어요. 그건 바로 삼화사 이전과 천은사 중건 업무였지요. 삼화사는 1977년부터 이전 매수가 시작되었어요. 그런데 조계사 총무원에서 구 삼화사 소유의 땅 매수금 전액을 가져가, 승가대학을 지으려 했어요. 유성암 주지를 비롯한 많은 신도가 농성에 들어갔지요. 결국 보상금의 일부가 이전 신축비로 결정 났어요. 지상과 쟁골 등 이전 부지를 물색하다 결국 무릉계 중대사터 아래, 현 위치로 확정되었지요. 그러나 총무원에서 내려보낸 금액으로는 어림도 없었어요. 본사에 보고하여 <지역민과 상생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삼화사 이전에 최대한의 지원이 필요하다.>라며 장비 기원을 건의했지요. 각종 토목공사와 목재 운반, 시멘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요. 당시 유성암 주지도 작업복에 장갑을 끼고 이전 중건 작업에 동참을 하다 다치기도 했지요. 그분은 참선과 새벽 예불을 중시하는 큰 스님이었는데, 1980년 열반하셨지요.
천은사도 천년고찰이지만 1948년 불로 전소되어 요사해 한 채도 없었지요. 월정사 재정교부를 보던 문일봉 스님이 1972년부터 그곳에 초가삼간을 지어 기거하게 되었지요. 그러다 쌍용에서 광산 개발을 목적으로 그 일대를 채광지로 매수하게 되었어요. 그 실무를 보는 과정에 문일봉 스님과 자주 만났지요. 우리는 <아무리 기간산업을 위한 광산개발도 중요하지만 천년고찰의 가람터를 없앨 수 없다.>라는 의견일치를 보았지요. 그래서 쉰움산 전 지역 중 천은사 일대는 <산림보호지구 해제>가 어렵고 <국토이용계획변경> 신청도 불가하다는 보고서를 상부에 냈어요. 그리고 천은사 중창공사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지요. 문일봉 주지와 신도, 쌍용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0년 동안 극락보전, 약사전, 영월루, 삼성각 등이 1983년에야 지금 모습으로 중건되었지요. 지역 출신 실무자로 내가 한 일은 절 앞으로 공장 구조물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자연환경 훼손은 물론 경관도 볼썽사나우니, 지하 동굴로 석회석 벨트라인을 설치하도록 종용을 했지요."
최준석 씨는 서울이나 타 지역으로 이사 가지 않고, 고향 동해 삼화를 고집한 이유로 방 한편에 있는 여닫이문을 가리켰다. 그 안에 4대 봉양 조상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봉양(웃어른 받들어 모심) 제사 때문에 차마 떠날 수 없어서 정년 후 삼화로 되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A4용지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복상꽃동네 홍도촌을 그리워하며 남긴 글이 다음과 같이 담겨있었다.
홍도촌
흰 달산 마주한 양지바른 꽃동네
파소를 거슬러 오르다 보면
쓰르라미 목청 돋우는 미루나무 마장
물도랑 언덕 끝 고샅에 있던 물레방아
대밭 뒷길 지나 우리 집 아래편엔
큰 감나무 높게 일력 엮은 다락 얹혀있고
두루미 떼 훼치는 소나무 숲
모 심은 들녘 십리장보 뚝길 다르면
감나무 골 앞 포강논에 물방개 맴을 도네
돌장광 어스름 달빛 파수굼
한여름 땀 쉰내 씻는 아낙들이 덤벙이고
부들왕골자리 깐 가시랑 차 길 높다리 동베개
마구간 누렁이 고삐 감아 내치면
탑거리 홍들버당 풀 뜯다 제 발로 돌아오는
삼십여 호 품앗이 나누건 복상꽃동네 홍도리
참고문헌_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삼화,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