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새끼(짚을 꼬아 만든 줄)가 생활필수품 시절
동해의 <동회리>는 쇄운리와 효가리 사이의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논은 적었다. 제법 넓은 논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1943년) <삼화제철>과 사택부지로 농지가 편입되는 바람에 더 좁아졌다. 그렇게 동회리 사람들 대다수는 좁은 토지에 농사를 지었지만 효가리와 쇄운리 못지않게 마을 사람들은 학력이 높고, 공무원 배출 등 인물이 많았다. 골 안에 있는 <의암곡>(옷바위)이나 <바람재>에 산삼이 났던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많은 식구 입에 풀칠하고, 자식들을 공부시킬 수 있었단 말인가? 동회리 사람들은 열이면 열사람 모두 <새끼틀>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보기 힘들고 생소하지만 과거 <새끼>가 어떻게 돈이 될 수 있었는지 이해를 못 할 것이다. 지금이야 모든 물건을 묶는 끈이 합성수지로 만든 비닐 끈이지만 5-60년 전만 해도 모두 '새끼줄'이 그 역할을 했다.
<새끼>는 일상생활에 필수품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가 맨 먼저 하는 일이 왼 새끼를 꼬아 아들이면 숯과 고추, 딸이면 숯과 솔가지를 끼워 대문에 건너질러 금줄을 걸었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가 태어났으니 부정하고 악한 잡귀는 금한다는 뜻이었다. 또, 이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한평생 살다 늙어 죽으면 자식은 죄인이 되어 왼 새끼를 머리에 두르고, 딸은 상복 입은 허리에 새끼를 둘러 이별의 곡을 했다. 논이 없는 농가에서도 가을 추수가 끝나면 제일 먼저 서두르는 게, 짚을 사두는 것과 김장하는 일이었다. 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놓고, 집집마다 다니며 품앗이를 해서 지붕을 덮는 일을 했다. 새마을운동 전에는 동회리 집들 거의가 초가집이었다.
지금이야 벼 수확할 때, 콤바인이 논에 왔다 갔다 하면 낟알이 부대에 담기고 짚은 논바닥에 가지런히 깔렸지만, 예전에는 일일이 벼 포기를 한 움큼씩 쥐고 낫으로 싹둑 잘라 단을 묶었다. 이 볏단을 논둑이나 길가에 세워 말렸다가 타작을 했는데, 발판을 신나게 밟으면 탈곡기가 <와릉와릉!> 돌아가며 볏단의 낟알을 털어냈다. 타작이 끝나가면 안 식구들은 햇벼 한 되를 절구에 넣고 찧어 햅쌀을 만들었다. 이 날이야말로 가족들 모두 신나는 날이었다. 햅쌀로 햅쌀밥을 해서 숟가락 고봉으로 떠서 입안에 넣으니, 밥에 기름이 잘잘 흐르고 혓바닥과 목구멍을 고생시키지 않고 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텃밭 귀퉁이에 볏단으로 볏가리를 쌓아놓았다가, 색이 바래고 축 쳐진 초가지붕부터 새 단장을 했다.
겨우내 볏가리에서 한 단 두 단 꺼내 소여물, 멍석, 가마니, 불쏘시개, 짚신, 새끼를 꼬았다. 특히 한 집안의 재산이 되는 소 먹이로 볏짚은 콩깍지와 함께 최고였다. 행랑채 부엌에 있는 큰 가마솥에 짚과 콩깍지를 작두에 썰어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면 소가 코를 벌름거리며 연신 <음매--에>하며 빨리 여물을 달라 울었다.
새끼는 용도에 따라가는 새끼, 중간 새끼, 굵은 새끼로 구분해 꿔야 했다. 금줄은 왼 새끼지만 집안에 쓰는 모든 새끼는 오른손을 바깥쪽으로 밀고 왼손을 안쪽으로 끌어당겨 양손 바닥을 비벼 꼬는 오른새끼였다. 새끼는 멍석, 가마니, 삼태기를 만들 때 기본으로 쓰였고, 모든 물건을 메고 감는 줄로 쓰였다.
볏짚을 유별나게 관찰하던 김형욱 씨
그런데 동회마을의 김형욱 씨는 볏짚을 유별나게 대했다. 벼를 수확할 때가 되면 송정들판이며 효가리 들판을 다니며 벼를 유심이 관찰했다. 벼가 곧게 똑바로 서있는지, 줄기를 흔들어 보며 탄력성이 좋은지 살폈다. 논 주인이 보면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왜 남의 벼를 만지고 난이야?> 소리 지를 만큼 오해를 샀다. 그러나 그럴 염려는 없었다. 어느 집 벼가 잘되고, 논 주인이 누구인지 내리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벼 베는 날인 언제인지 알아내어, 공짜로 품을 팔겠다고 논 주인과 타협을 했다. 그 대가로 볏짚을 싸게 살 만큼 수완이 좋았다. 흥정이 끝나면 타작하는 날도 품을 팔아, 해 질 녘에 볏단을 지게에 차곡차곡 쌓아 집으로 지고 왔다. 김 씨가 얼마나 많이 지고 가는지, 그 모습을 본 이웃사람은 '웬 초가집이 움직이나 했네!'라 말했을 정도였다.
김형욱 씨는 볏짚을 마당가에 하나하나 공들여 쌓고, 그날 밤에 쓰일 만큼의 볏단을 '새끼틀' 옆으로 가져왔다. 그리곤 볏단에서 한 움큼씩 벼줄기를 뽑아 손가락을 깍지처럼 구부려 북데기를 밖으로 쓸어내렸다. 이어 밑단을 잘 간추려 쌓아 놓고, 우물에 가서 물 한 바가지를 퍼와 볏단을 축축하게 축여놓았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며 허리춤에 가리개를 감고 '새끼틀' 옆에 앉아 외발 치기 발판을 밟으며 볏짚을 감각적으로 집어 깔때기 안에 넣았다. 기계가 딸그락 거림며 빙글빙글 도는 방구리에 꼬인 새끼가 감기기 시작했다. 새끼 굵기가 똑같고, 북데기가 없이 미끈한 새끼였다. 그는 어림잡아 길이가 300m가 되면 발판에 발을 떼고 토리를 처마 밑에 쌓았다.
동회리에서 최초 새끼틀 구입한 인물 김형욱
동회리에서 최초로 <새끼틀>을 구입한 사람이 김형욱 씨였다. 그가 새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묵호항'에 다녀오고 나서부터였다. 묵호항은 일제강점기 대 도계, 철암, 장성에서 채광한 무연탄을 일본으로 싣고 가기 위해 만든 항구였다. 해방이 되어서도 무연탄 업자들은 묵호항에서 전국의 항구로 싣고 가 고 밥 하는 십 구공탄을 만들어 연탄공장에 팔았다. 또, 묵호항은 전국의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을 불러들였는데, 바로 동해안의 황금어장 때문이었다. 꽁치, 오징어, 도루묵, 양미리, 명태가 사시사철 잡혀 어판장과 덕장에는 일거리가 천지였다. 지게 하나만 가져가면 온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이웃마을인 북평읍 사람들은 오일장만 이용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매일 장이 서는 묵호의 상설시장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김형욱 씨는 매일 장이 설만큼 사람과 물건이 많다는 묵호로 향했다. 구역전, 향로동 번개시장과 덕장을 구경하고, 현재의 발한 삼거리 일대에 열리는 상설시장(그때는 현재 중앙시장이 없었음)을 구경하다, <안묵호>로 발길을 돌렸다. 묵호항 부두에 가자 고기 비린내가 진동하고,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중 유독 눈에 띈 이들이 지게꾼이었다. 그들은 소쿠리에 오징어를 담더니, 등대 밑의 골목으로 줄 서서 걸어갔다. 김 씨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들을 따라갔다. 지게질만큼은 자신이 있어 볏단을 쉰 단이나 지고 좁은 논둑을 걷는 실력이었지만, 앞서가는 지게꾼에게는 어림없는 실력이었다.
지게꾼들은 소쿠리 밑으로 물이 질질 흐르고, 진흙길은 질퍽거렸는데 한참 꼬불꼬불한 골목을 오르더니, 드디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다다랐다. 언덕 곳곳에는 나무 장대가 서있는 덕장이 있었다. 오늘날 놀골담길 정상으로 추측된다. 여자들이 빙 둘러앉아 지게꾼들이 내려놓은 오징어를 손에 잡히는 데로 한 마리씩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장대 사이로 쳐진 새끼줄에 척척 걸었다. 김형욱 씨는 오징어에는 관심 없고, 유독 새끼줄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잘하는 일은 지게질과 새끼 꼬는 일이 아니던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덕장 주인에게 '저 새끼를 어디서 구하냐?'라고 물었다.
"장사꾼에게 사지 어디서 구해요?"
"아니 새끼줄을 다 삽니까?"
"그럼, 사지, 누가 공짜로 줍디까?"
김형욱 씨는 대오각성 한 스님처럼 무릎을 탁 치며 <바로 이거다!>라 소리치고 덕장에서 내려왔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어가며 새끼를 꼬았다.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며칠을 꼬아, 드디어 한 짐이 되자 새끼를 둘둘 말아 지게에 지고 묵호 등대 및의 덕장으로 갔다. 주인은 며칠 전에 본 아저씨가 지게에 새끼를 한 짐 지고 오자, 반가워 물 한 대접을 내밀며 흥정을 했다. 밤낮으로 새기를 끄고, 이십 여리 길을 지게에 지고 걸어온 노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돈을 받았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 아니던가. 그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부지런히 새끼를 꼬아서 꾸준히 거래를 했다. 김형욱 씨는 갈 때마다 싫은 내색 한 번 안 하고 새끼를 사주는 덕장주인이 고마웠다. 그런데 묵호로 자주 드나들수록 요령이 생겼다. 굳이 멀고 높은 덕장까지 가지 않더라도 향로동 시장에서도 얼마든지 새끼를 팔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새끼도 돈이 된단 말이여?
새끼와 묵호에 대해 하나 둘 알수록 김형욱 씨는 꾹 닫았던 입이 마려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집 주위의 지천으로 있는 새끼가 묵호에는 돈이 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다들 <새끼도 돈이 된단 말이여? 이게 뭔 일이데!> 하며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낮에는 논밭에 나가 일하고, 밤이 되어야 새끼를 꼬았는데, 곧 잠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 농사일에 지장이 있고, 돈 몇 푼 벌어봤자 등잔불 등유 값까지 벌겠냐? 하는 회의가 생겨 새끼 꼬기를 중단하는 집이 많았다. 돈이 아쉬운 집들은 잠을 참아가며 손바닥과 손가락이 나무 뜨 거지가 되도록 새끼를 꼬았다. 그런데 묵호덕장 가는 길도 모르고 장사해 본 경험이 없으니 아예, 김 씨 집으로 가져가 도매금으로 새끼를 넘겼다.
이러다 보니 김 씨는 점점 묵호로 가는 횟수가 많아지고, 단골도 여러 집 생겨났다. 일 년이 지나 그동안 모은 돈으로 논까지 사니, 동네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더구나 어느 날 난생처음 보는 기계를 사 왔는데, 그게 <새끼틀>이었다. 발판에 발바닥을 대고 저으며 깔때기에 짚을 밀어 넣자. 둥근 틀이 빙빙 돌며 새끼가 감겼는데, 속도가 손바닥으로 비벼 꼬는 것보다 몇 배 빨랐다. 동네사람들은 <이게, 뭔 일이야!>라며 탄성을 질렀다. 그리곤 김 씨에게 애걸복걸해 과부 땡빛이라도 내서 기계를 사기 시작했다. 어른만 기계를 만지는 게 아니라 힘이 안 드니, 전 식구가 돌아가며 새끼틀에 앉았다. 동회리에는 새소리만 우는 게 아니라 밤낮으로 새끼틀이 <내 돈, 내 돈!>하며 돌았다.
매일 새벽 4시면 집집마다 불이 켜졌다. 집집마다 지난밤 만든 새끼 토리를 묵호로 가져가기 위해 서둘렀다.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핵생들은 힘에 맞게 토리 3개를 묶어 멜빵을 해 어깨에 메고 갔다. 지게에 지지 않는 이유는 곧장 돌아서서 그 길로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어른들은 지게에다 7 토리를 지고 가고, 아주머니들은 홀수 개수를 옆으로 묶어 머리에 이고 갔다. 아무리 단단하게 메어도 뒤에서 보면 머리 부분은 위로 솟고, 양 옆으로 축 쳐져 있었다. 10리가 넘는 길을 혼자 가면 힘들지만, 동회리 사람들은 20집 이상 줄을 서서 어둠을 헤치고 묵호로 향했다. 철도기관고 옆길, 역전, 용정, 천곡 철길, 하평, 향로동, 묵호항으로 갔다. 일단 묵호에 가면 각 집마다 능력껏 흥정을 해 새끼를 팔았다.
전날에 비가 오거나, 고기가 안 잡히면 새끼도 팔리지 않았다. 그럴 때 단골로 정한 철물점, 제재소, 얼음공장에서 싸게라도 사주었다. 고기가 많이 잡힌 날은 새끼 장사도 잘 되고 값도 좋았다. 어물을 건조하고 상자에 보관할 때 필수적인 것이 새끼였다. 동회리 새끼는 날이 갈수록 묵호어판장의 모든 고객에게 만족감을 줄 정도로 질이 좋아졌다. 새끼틀이 마을마다 보급되었지만, 동회리처럼 묵호로 진출하지 못했다. 질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고, 점차 새끼 소비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질기고 편리한 합성수지 끈이 대량으로 생산되니, 품질 좋은 동회리 새끼도 빛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동회리의 많은 학생이 월급날이면 선물 한 보따리씩 사들고 고생했던 부모님을 찾아갔는데,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와릉, 와릉!> 새끼틀 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 후, 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에는 그들도 아버지 나이가 되어 있었다.
이 글은 동회리 새끼틀 붐을 일으킨 가상 인물로 당시 정서를 재미있게 구성한 글이다.
(새끼_볏짚으로 꼬아 줄을 만든 것, 새끼틀_볏짚으로 새끼를 꼬는 기계)
참고문헌_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북삼,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