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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Apr 29. 2023

 옛날 옛날, 묵호이야기!

33.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묵호의 호황과 함께한 동해는 보기 드문 고령 조기축구회가 있었다. '70대 동해축구회'가 주인공들이다. 직업과 연령이 다양하지만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매일 아침 6시가 되면 운동장에 모였다. '질러'. '일로 패스!', '그따위 밖에 못차?' 등 현장은 한바탕 소리 지르며 공을 차다, 흘린 땀을 씻으러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이 정도면 우리가 자주 보는 아침 축구장의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들은 점심을 먹고 나른해지기 시작하는 13시 30분쯤 하나 둘 단골찻집에 모인다. 하나 둘 모이면 뭔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끝이 없다.

이날도 맨 처음 도착한 선장 출신 김정호(남, 76,2020)씨가 이야기 주도권을 잡는다. 그의 말투는 크지 않고 속삭이듯 차근차근했는데, 후배가 갑자기 고향을 물었다.

"형네는 언제 묵호로 왔우?"

"내는 7살 때 경북 상주서 왔다. 아버지는 '도리 끝'에 자리 잡고 한 지붕 두 가족이 사는 집에 짐을 풀었어. 당시 집들은 복판에 부엌이 있고 양쪽에 방이 각 한 칸씩 있었지, 나는 객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뭐든지 신기했어. 아버지 따라 항구 어판장에 갔어요. 부두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내 또래 아이들이 겁 없이 거기서 다이빙하고 헤엄치는 게 신기했어. 항구는 수많은 고기와 배들, 사람들이 늘 북적북적거렸어. 태풍이 오면 '게구석;으로 가서, 바위 뒤로 숨는 게를 잡아 집으로 가져가 탄불에 구워 먹으면 낫이 기막혔지, 매일 바다에 살다 보니 배 타는 게 자연스러운 시절이었지.


처음은 가까운 바다에 나가 미역이나 문어를 잡는 4인 1조의 머구리배를 탔어, '머구리'(잠수부)가 바다에 들어가면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쉴 새 없이 펌프를 젓는데, 한창 힘쓸 때라 겁 없이 이 일을 했어, 머구리는 '후꾸'(잠수복)를 입고, '가보또'(쇠모자)를 쓰고, 허리에 납덩이를 차고 바닷속으로 들어갔어, 우리가 펌프를 저어 만든 공기는 호스를 타고 가 '가보또'옆으로 연결된 '기루뽀'(공기압 조절)로 들어갔다. '머구리'는 '기루뽀'를 조절하며 미역이며 전복, 고기를 잡았는데, 망태가 가득 차면 수면 위로 올라와 '가보또'를 벗겨. 이때, 까딱 잘못하면 시베리(잠수병)에 걸려 눈이 멀고 반신불수가 되고 말아.

배에서 내리면 쌍화차를 마셨던 묵호의 명소, 나포리 다방

내가 최초로 모셨던 머구리를 얼마 전에 발한삼거리에서 봤는데 여전히 지팡이로 땅을 치며 걷는 거야. 내가 반가워 인사하자. 종호라구? 나포리가 어디야? 거기 가자.'라 하셨어. 그때 우리 한 조는 배에 내렸다 하면 태양여관 앞 '나포리 다방'으로 가서 계란 노른자가 있는 쌍화차를 마셨거든. 나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아, 동해문화원이 2010년부터 만든 논골담길에 추억을 소환하며 민간인 작가가 차린 '나포리 다방'으로 모셔 쌍화차 한잔 했지. 만약에 그 어른이 몸에 이상증세가 있을 때 곧장 차에 때워 울진 덕구온천으로 갔으면 반신불수가 안 되었을지 몰라. 따끈따끈한 온천에 들어가 몸을 맡겼으면 혈관을 확장시켜 줘야 하는데. 그만 골든타임을 놓친 거지.


배 타다 보면 별일을 다 겪게 돼, 제대한 후 고려원양선을 타고, 사모아로 참치 잡으러 갔어. 이 배는 30개월이나 바다 위에 떠있으며 3만 톤의 참치를 잡아 냉동하는 배였어. 그런 어느 날, 기관실에서 불이 난 거야. 제주 출신 선장은 당황해 조난 신고를 했는데. 바다 위치를 잘못 말한 거야. 아침에 신고했는데. 저녁이 되도록 소식이 없자 선원들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어. 다행히 지나던 비행기가 연기 나는 우리 배를 발견 신고해 살아났지. 또 한 번은 내가 신참 선장이 되어 냉동선을 탈 때야. 출항했다 하면 3개월을 망당 대해에 살아야만 돼. 그러니, 선원 간에 싸움이 나고, 술 취해 선장 한데 대드는 일도 허다해. 몇 번 이런 일을 겪은 후에는 출항하기 전에 목소리 크고 힘 좋은 선원 4명을 따로 만나. 선원관리 해주는 대가로 수확량의 1%를 주겠다. 등의 제안을 했어. 그러면 그들이 선원관리는 다 알아서 해주었지.


한 번은 명태바리 갔을 때 만선이 되어 돌아오는데, 기관실에서 '펑'하며 불이 난 거야. 나는 긴급구조를 요청하고, 기다리는 동안 16명의 선원 모두 초주검이 되었어. 배를 타다 보면 죽음은 잠깐이야. 그러니 거칠 수밖에 없는 거야. 89년도에 고성에 가서 내 배를 사서 오징어바리 하다, 2007년도에 감척 할 때 미련 없이 응해 놀고 있지. 40년 넘게 배를 탔으니, 바다나 배의 미련은 없어. 매일 아침 만나 공차다 이렇게 만나 차 한잔 하며 옛날이야기 하니, 이보다 더 좋은 기 뭘꼬?"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고참 이형순(78. 남, 2020)씨가 씩 웃더니, 젊어서 영업했던 화려한 시절 묵호 밤업소의 이모저모를 들려준다.
동해 발한동의 음악다방 '갈채'의 추억

"나는 묵호가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한창 경기 좋을 때인 76년부터 90년대까지 유흥주점을 했어. 맨 처음 발한동에서 '카네기'를 하고 80년대는 농협 건너편에서 '동그라미'를 하다가 90년대는 음악다방인 '갈채'를 했지. 요즈음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1종 허가는 까다롭고 비쌌어. 내가 비싼 돈 들여가며 기를 쓰고 하려 한 이유는 경기가 좋았기 때문이야. 묵호를 중심으로 여러 공장이 있었고 전통의 항구가 있다 보니 젊은 친구들이 엄청 찾았지. 게다가 월급도 많이 받는 데다 한창 팔팔한 시절이다 보니, 끼를 발산할 데를 찾았던 거지. 주요 고객은 쌍용양회(현재 쌍용 C&E 동해공장), 동양시멘트(현재 삼표시멘트), 한라시멘트 근로자가와 해군 부사관들이었어.


동그라미 할 때는 아가씨가 70여 명이나 되었어. 이 아가씨들은 스스로 A, B, C 그룹을 나누어 A는 주로 술을 같이 마시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B는 주로 홀에 나가 신나게 춤을 추지. C는 통행금지가 있을 때니 손님과 함께 총알택시를 타고 강릉의 고급 호텔 클럽으로 가서 2차를 즐겼어. 영업이 잘되려면 아가씨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밴드의 연주도 필수적이야. 나이트 밴드는 한 달에 한 번씩 교체했어. 손님들은 다양한 연주에 춤추기를 원하기 때문에 뻔한 레퍼토리 연주에 싫증을 내기 때문이야. 싸롱은 주로 6인조 밴드인데, 자기들이 돌아가면서 바꾸었어. 고고장은 젊은 밴드라야. 신나는 음악을 연주했지. 그런데 꼭 손님들끼리 싸우는 날이 있어. 주로 춤추다 부딪히거나, 발을 밟히거나, 기분 상한 일이 있으면 괜히 시비를 걸어 싸우지. 이때를 대비해 휴흥업소에는 꼭 어깨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중간에 나서 정리를 하였지."

조용히 듣고 있던 한명수(남, 74,2020) 씨도 할 말이 있다며 외친다. 그는 더 오래전 60년대의 가난했던 시절 묵호 이야기를 들려준다.


술의 도시로 불리던 묵호는 '강호소주' 공장과, '양조장'이 있었다.

"지금 묵호동주민센터 가는 삼거리 초입의 이발소 자리에 예전은 '양조장'이 있었어. 우리는 부두에서 갈고리로 고기를 찍다가 배고파지면, 이 양조장 앞으로 왔다 갔다 했어. 그러면 일하는 아 저 씨가 손으로 불러. 막걸리 무거리 한 바가지 줘. 막걸리 거르고 남은 건데, 시큼한 냄새가 났지만 일단 먹으면 배가 부르니, 손으로 퍼서 먹어. 그러면 얼마 안 지나 기분이 좋아지고, 걷는 것도 건들거렸어. 우리 아버지는 간조 날이 되면 꼭 나를 불러 발한 파출소 옆체 있었던 '강호소주' 공장에 심부를 보냈어. 됫병 색이 검고, 도수가 30도나 되는 독한 소주였어. 아버지는 그 독한 소주를 잔이 아니라 사발에 콸콸 붓고, 단숨에 마시고는 명치나 소금을 안주로 먹었어. 간혹 친구 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실 때는 돌아가며 한 곡조씩 노래 부르며 젓가락으로 우리 집 상이 북이 되고, 놋그릇이 징이 되어 박자를 맞추었어. 이런 모습을 자주 보다 보니, 나도 오징어바리 나갔다가 돌아오면 꼭 가는 곳이 묵호시장 뒷골목의 이층 집이야. 좁은 계단으로 올라가면 다락방이 나오는데, 상 하나에 아가씨들 둘, 손님들이 앉으면 딱 맞아. 술 마시며 취하면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하다. 오징어 먹통을 빼고 거기다 소변을 뿌리는 객기를 부리기도 했지. 술에 취해 좁은 계단을 내려오다 떨어지는 게 다반사였지."

묵호시장 뒷골목, 술집상가, 1960년대, 사진_동해문화원 DB
나이 든 양반들이 신나게 떠드는 말을 듣던 찻집 사장인 유효순(여, 67,2020)씨도 슬쩍 자리에 끼어 앉아, 화려했던 시절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90년대 묵호역전에서 싸롱을 하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나는 꽃다운 나이에 부산으로 시집을 갔다가 사정이 있어, 이혼을 하고 고행으로 돌아왔어요. 엄마가 내 어깨를 흔들며 '이 년아, 구만리 같은 앞날에 우타 살겠다고 돌아왔노?'하며 울었어요. 나는 엄마에게 '젊은 년이 설마 살길이 없겠어요?' 라 대꾸하며 다음날부터 살길을 찾아 나섰어요. 그러다 유일한 친척인 외사촌 오빠의 가게로 갔어요. 오빠부부는 '동해프라자'에서 소갈비 식당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매일 식당에 나가 써빙을 했는데, 한라시멘트 직원들이 회식하러 자주 왔어요. 그 중에 노동조합 간부도 있었는데, 키 크고 어리게 보이는 내가 써빙 일을 하는 게 안 되어 보였던지, 가게를 직접 차려보라며 부추겼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오빠네 가게에서 써빙으로 구만리 같은 앞날을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험한 세상 헤쳐나가려면 돈이 필요한데, 젊을 때 돈 좀 장만해야 하지 않겠냐며 나를 다독거렸어요. 그래서 내 돈에다 엄마 돈을 합치고, 외사촌 오빠 보증으로 새마을금고에서 대출을 받아 묵호역 앞에 '집시카페'를 냈어요. 당시 쌍용, 동양, 한라 등 시멘트 회사 경기가 최고로 좋던 때(1994)였어요. 봉급이 매년 15% 이상 올랐고, 24시간 가동해도 시멘트가 모자라, 공장마다 증설했어요. 그러니 현장 직원들도 오버타임과 잔업을 많이 해서, 다들 월급 때가 되면 2, 3백만 원을 받을 만큼 부자였어요. 우리 가게의 단골은 주로 한라시멘트 간부들이었는데, 돈을 물 쓰듯 했어요.


당시는 양주와 맥주를 섞어 폭탄주를 만들어 일단 취한 후,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어요. 10시가 넘으면 슬슬 자리를 떠서 나이트클럽으로 춤추러 가는 게 당시 풍속이었어요. 나는 백지상태에서 유흥음식점을 시작했지만, 서서히 현실에 물이 들기 시작했어요. 단골손님이 끄는 데로 나이트에 가서 춤을 춰보니, 그 기분을 알 것 같았어요. 춤출 때만은 '세상살이 뭐 별거 있어? 이렇게 즐겁게 춤추며 사는 거야!' 하며 신나게 몸을 흔들었어요. 그렇게 술과 춤에 취한 듯하면서도 2년 동안 돈을 엄청 벌었어요. 엄마에게 빌린 돈 갚고, 대출한 돈도 갚았어요. 그렇지만, 이 어느 날, 대구사람들이 운영하던 '파이낸스'에 벌었던 돈을 몽당 투자했어요. 당시 은행 이자가 높을 때인데, 그것보다 훨씬 높은 배당금을 준다는 유혹에 빠져 거금 7천만 원을 투자했어요. 이 돈이면 천곡의 주공아파트 두 채를 살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회사에서 배당금을 착착 잘 주었는데, 넉 달째부터 행정을 감춘 거예요. 나 같이 속은 동해의 아주머니들이 땅을 치며 울어본들 먼 소용이 있었겠어요.


나는 엄마와 점쟁이가 간곡히 한 말인 '니 팔자는 공돈 못 먹고 사니, 그리 처신해라!'라 했건만 욕심에 눈이 멀어 당한 거지요. 그래서 다시 단란주점을 차렸어요. 나이트가 한물가고, 룸에서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는 단란주점이 유행이 이어졌지요. 그동안 나를 도와주던 단골들이 자주 찾아와 가게 영업 실적이 아주 좋았어요. 매일 밤 음주 가무가 되풀이되었지만 나는 이중에 술만큼은 철저히 멀리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가 갑자기 생각났어요.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 '우리 이쁜 딸, 너는 이다음 심청이 같은 효녀가 되거라!'라며 이름에 효孝자를 넣었거든요. 나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12인승 갤로퍼를 사서 어머니가 다니는 경로당으로 가 엄마와 친구 분들을 태워 덕구온천이나 백복령으로 다녔어요. 이혼해 왔다고, 술집 한다고 뒤에서 욕하시던 엄마 친구 분들이 '우리 효순이가 내 친자식들보다 낫네!' 하며 좋아 아셨어요. 이젠 엄마도 나도 놀러 다니기에 나이가 많아 쉬고 있지만, 가끔 경로당에 찾아가 고기 파티로 즐겁게 해 드리지요."

묵호의 모습, 사진_동해문화원 DB
참고문헌_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동해,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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