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시골집 소를 팔아 가수의 꿈을 키워 온 인물이 있다. 강원도 동해 삼화 6통에서 오른쪽 골 이기리 방향으로 오르면 나오는 덕망골 정상 넓은 평지의 집 3채 중 한집에서 태어나 지금은 북삼동에 거주하는 김병기(남, 70, 예명 김우라)씨는 아득한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산 사람으로 지내던 김병기(예명 김우라)씨에게 어떤 일이?
"할아버지는 북평 구미마을에서 잘 사는 부자였데요. 자식들 교육을 위해 이사하려고 농토와 키우던 소 세 마리를 모두 팔았대요. 어느 날 미리 보아 둔 강릉의 12칸짜리 집을 사기 위해 계약금만 갖고 출타했대요. 그런데 그날, 큰삼촌이 농 안에 든 돈을 몽짱 들고 만주로 튀었대요. 집안은 풍지박살(풍비박산)이 났지요.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는 맨손으로 덕망골로 들어오고,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고, 작은 삼촌은 어디론가 떠나갔대요. 다행히 고모들은 시집을 갔었대요. 아버지는 6.25 때 둔 수색대에 근무했는데, 휴가를 나와 장가를 갔어요. 큰 아들 때문에 화병이 난 상태로 화전만 일구던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1954년) 만세 삼창을 불렀대요. 구 후 6년 만에 제대한 아버지가 덩망골로 들어와, 2남 2녀를 더 낳았지요. 나는 19살까지 평범한 신골 청소년으로 살았어요. 등하굣길은 1시간이 더 걸렸지요. 졸업을 하고부터 낮에는 일하다 밤이 되면 약속한 집에 모여 동네 친구들과 놀았어요. 우리만이 아는 산길로 장재터, 거랑말, 반쟁이에 사는 친구들 집으로 갔지요. ㄱ자 모양의 군용 후렛쉬를 구해 밤길을 잘도 다녔지요. 주로 엿치기, 화투, 윷을 치며 내기를 했어요. 집집마다 차례로 돌며 닭서리를 하고, 여자아이들은 밀가루와 팥은 가지고 와 술약을 넣어 찐빵을 해 먹었어요. 어떤 날은 차좁쌀을 갖고 와 인절미도 만들었어요. 사내에 들은 겨울이 되면 쇠창을 만들어 산돼지를 잡으로 갔어요. 눈이 내리면 싸리나무로 엮은 삼태기에다 돌을 얹고, 그 속에 칡순을 넣어 산토끼를 잡고, 싸이나를 넣은 콩으로 꽁을 잡았지요. 어떤 고기든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버린 후, 가마솥에 져 처마 끝에 매달아 놓고, 오고 가며 칼로 육포를 떠서 간식으로 먹었지요."
이렇게 산 사내로 지내던 김병기에게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삼척문화방송(지금 MBC강원영동)이 개국(1971년 4월)해 라디오를 틀면 덕망골까지 들렸기 때문이다. '한낮의 노래선물', '3시의 희망곡', '별이 빛나는 밤에'가 그의 애청 프로그램이었다. 매일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니 실력이 나날이 향상되었다. 김병기는 '김우라'라는 가명으로 음악신청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주로 오기택과 김상진 노래였다. 장작을 북평장까지 지게에 지고 가, 판 돈으로 전부 엽서를 사 방송국에 신청곡 엽서로 보냈다. 이때 가장 많이 보낸 사람이 호현마을에 사는 이병태였다. 훗날 '문화방송 애청자 모임'을 만들어 서로 친목을 나누기도 했다. 김우라는 아버지 눈을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오후 3시만 되면 슬며시 산에서 내려와 이장 집으로 갔다. 밭에 일하러 나가고 없는 집이지만,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화기를 돌려 노래를 신청하고 DJ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가수 지망생 선발대회 입상, 작곡가 따라 서울행
DJ_김우라님은 우리 방송 애청자이신데 노래도 잘 부르나요?
우라_우리 동네에선 나를 명가수라 불러요
DJ_그래요? 서울 작곡가 선생이 우리 방송국에 와 가수 지망생 선발대회를 하는데 출연해 보시죠.
우라_ 상이 있어요?
DJ_그럼요. 부상이 있고요, 3등까지 서울의 유명 작곡가 문하생이 되는 특혜도 주어져요.
김병기는 정라진 동두고개(후 삼척중앙시장, 갈천동으로 이전)에 있는 당시 방송국으로 갔다. 영동지방의 가수 지망생 80여 명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곡가는 시작하기 전 무대에서 '연주는 피아노로만 하며 박자 음정 무시하고 단지, 목소리와 끼만 보고 심사하겠다.'라며 출연자의 긴장을 풀어줬다. 김우라씨는 이날 오기택의 '고향무정'을 불렀다. 다행히 3등 안에 들었다. 작곡가는 세명을 부르더니 내일 아침까지 1만 5천 원을 챙겨서 서울로 갈 채비를 하고 오라 했다. 당시 짜장 한 그릇에 20원, 기타 하나에 2,500원, 소 한 마리에 95,000원 할 때였다. 죽을 듯이 애원하는 맏아들의 간청에 아버지는 그 큰돈을 내주었다.
1972년 유니버설레코드사 음반 취입, '사나이 고향'발표
"북평역에서 첫 기차를 타고 오후 1시에 꿈에 그리던 가수의 꿈을 안고 청량리에 도착했어요. 화양동에 있는 사무실을 구경하고, 뚝섬에 방 한 칸을 얻어 셋의 짐을 풀었어요. 다음날부터 우리는 각자 기타를 사서, 사무실에 나가 '파도성'이란 조수에게 기타와 발성연습을 배웠어요. 나는 1년 만에 드디어 '유니버설레코드사'와 작사 장석일, 김태영 작곡, 편곡의 노래 '사나이 고향'을 음반번호(UL 2737)로 싱글 옴니버스 음반을 발표했다. 처음은 300장을 찍어 전국의 각 방송국에 보냈어요. 그런데 사무실에서 PR비용을 부담하라 했어요. 황소 4마리에 해당하는 40만 원이었어요. 그 큰돈이 어디 있어요? 낙담 끝에 달랑 기타와 음반 몇 장을 들고 하향했지요. 그래도 처음 방문한 곳이 삼척문화방송이었어요. 의리를 지키느라 내 노래를 많이 틀어주었지요. 나는 매일 술로 세상과 가난을 원망하며 세월을 보냈어요. 하루는 방송국에서 연락오기를 '삼화극장'개관 기념 콩쿠르대회(1973년 4월)를 하는데 지역출신 초청가수로 출연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장 집에 가 양복 한 벌을 빌려 입고 이동교, 남교 형제의 밴드 연주에 맞춰 세 곡을 불렀어요. '고행이 좋아', '사나이고향', '도라지 고갯길'이었어요. 그게 대중 앞에 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어요. 그 후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연락이 와 상경했지만 아버지 손에 끌려 다신 ㅐ려왔지요.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장가도 가고 쌍용 광산에 취직해 40년 가까지 다니다 취직했어요."
지금도 '사나이 고향'을 부르며 가수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나이 내 고향 가사는 다음과 같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저 하늘 흰 구름아
사나이 고향소식 너는 알겠지
말을 해다오 말을 해다오
내 눈물 씻고 달랠 내 고향
내 곁에 있다 해도 고향만은 못 잊어
내 가슴에 젖어있네 그리운 내 고향
김랑기(여, 59,2015년)씨는 김병기 씨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시집가기(29살) 전까지 꼬박 덕망골에 살며 농사를 지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충실한 일꾼이었다. 날이 새면 샘물가로 내려가 물동이에 물을 퍼 담아, 부엌의 큰 동이에 물을 채우고 밭으로 나갔다. 주로 감가, 콩, 들게, 메밀, 광쟁이 등의 농사를 지었다. 옥수수와 고구마는 신짐승 때문에 아예 심지 않았다. 오빠와 남동생은 덕망골에 사는 게 답답하여 밖으로만 돌았지만, 여동생인 그녀는 매일 밭에 나가 풀을 매는 게 그리 편할 수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이웃동네에 살던 16살짜리가 앞집 총각과 연해해 애까지 배자,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했다. 한 달에 한 번쯤 어머니를 따라 북평장이나 묵호 세상구경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마냥 살 줄 알았는데,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온다. 바로 달방마을 출신 총각에게서 중신이 들어온 것이다.
"중매쟁이가 사진을 보여주며 11남매의 줄째라 소개했어요. 삼척의 동양시멘트에 다니는데, 심성이 굳고 착하다 했어요. 나는 시집갈 마음이 없는 터라 시큰둥했어요. 어머니가 하도 만나나 보라고 보채, 미장원도 안 가고 일상복으로 중매쟁이 집에서 만났어요. 나도 그 사람도 말이 없었어요. 그 후 묵호 극장에서 한 번 만나고 삼척 죽서루에서 만났다가 헤어질 떼 어둑했어요. 그 사람이 갑자기 '나중에 혹시 밥을 해줄 수 있는지요?'라 묻기에 나는 '밥 못 하는 여자도 았나?'라며 고개를 끄떡였어요. 그런데 그 말이 결혼을 승낙한 걸로 알고 중매쟁이를 통해 나를 밀어붙이기 시작했어요. 그럴 때 하필이면 우리 집에 불이 났어요. 왜냐하면 쌍용 광산 3 지구에서 매일 발파를 할 때마다, 머리만 한 돌이 떨어지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그때는 발파 기술이 어설퍼 집도 흔들거려 벽에 금이 가고, 기둥도 기울었어요. 그런데, 콩 농사를 수확해 하루는 매주를 쑤고 띄우느라 방바닥에 요를 깔로 아궁이에 불을 땠어요. 그런데 그놈의 발파 때문에 행랑채 방바닥에 금이 나버려 그 사이로 불길이 올라왔어요. 결국 요에 불이 붙어 집이 홀랑 다 타 재만 남았어요. 아버지가 회사로 찾아가 대차게 항의를 했어요. 겨우 집을 새로 짓는데 지원을 일부 받아 냈지만 당장 잘 방도 없어니 어머니가 시집이나 가라며 막 밀어붙여, 결국 시집을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일에 워낙 익숙해, 일을 안 하면 병이 날 정도였어요. 그래서 시집간 후에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온갖 막일을 했지요. 그러다 내 고향 덕망골에서 국수를 해 먹을 때가 그리워 효가리에 칼국수집을 차렸어요. 다행히 토속 장맛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 장사도 잘되고, 남편도 직장(쌍용자원개발)에 다니고 아이들도 장 커 혼사를 시켰지요."
참고문헌_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삼화,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