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브런치스토리로 떠나는 동쪽여행
동해 송정의 변화, 북평역의 역사
동해 송정의 변화 과정과 역대 모습은 1940년 '북평역' 개통의 역사와 함께한다. 도계-묵호의 무연탄 수송 때문에 생긴 '삼척철도'의 본사가 묵호에 있었지만, 철도의 주요 업무인 화차, 객차의 점검, 연료 공급, 전기 철로 보수, 인사, 회계사무, 관사 등이 전부 송정에서 이루어졌다. 앞들에서 농사를 짓고, 글을 읽던 한적한 농촌마을에 갑자기 영동 제일의 교통도시가 되었다. 철도 외에도 북삼화학(DB메탈)의 전신과 삼화제철소, 묵호항, 탄광지대의 배후도시로 자리 잡자 전국에서 사람들이 송정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탄광지대나 묵호의 호경기와 달리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공장은 격변의 혼란 속에 가동과 중단이 반복되었다. 당시 약삭빠른 묵호 여성들은 '다라이(대야의 일본어)'에 어물을 싣고 도계, 통리, 장성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역에서 흘러나왔다. 송정의 억척아줌마들도 하나 둘 채소를 '다라이'에 이고 도계로가, 재미 본다는 이야기가 시장에 돌았다. 그쪽은 묵호처럼 개도 돈을 물고 다닐 정도로 경기가 좋은 별천지였다. 철도 관사에 편하게 살던 홍숙희(여, 84,2014년) 할머니는 남들보다 늦게 대야 장사에 뛰어들었다. 아이들에게 한창 돈이 들어갈 때인데, 철도에 퇴직한 남편이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농산물새시장이 문 열기 전에는 삼척 번개시장에 가서 물건을 짝으로 사서, 50kg쯤 나가게 짐 꾸려 열차로 붙였어, 대다수 다라이 아주머니들은 운임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짐 하나를 나눠, 반은 머리에 이고 반은 양팔로 들고 개찰구로 갔어, 어떤 날은 보따리 운임 때문에 역무원과 싸우다가 기차를 놓치거나, 짐을 다 못 싣고 갈 때도 있었어, 운임 몇 푼 때문에 며칠 번 돈을 다 까먹고 그랬지, 그래도 매일 밤, 몸빼 주머니에서 돈 한 뭉치 꺼내 하나 둘 세는 낙이 제일 좋았어, 도계에 가면 짐을 다 팔고 구공탄을 한 대야 사 올 때가 많았어, 송정 탄보다 값이 싸고, 진흙이 덜 들어가 화력이 더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지.
한 리어카쯤 모이면 팔아 목돈을 만졌지, 또, 광부들은 월급 대신 쌀 전표를 많이 받았는데, 쌀을 우리한테 팔아 채소를 사갔어, 고사리, 신기, 상정에 사는 아낙들도 도계시장에 와 메밀이나 좁쌀, 보리쌀 등을 우리한데 팔았어, 우리는 돼 가 좋아 그런 낟알을 많이 사 와 되팔았지."
60년대 절도에 근무하는 사람은 쌀 두 가마에 해당하는 월급을 받았다. 특히 기능계통에 근무하는 사람은 연공가산제가 적용되지 않아 십여 년의 경력자가 신입과 월급 차이가 없었다. 철도청은 적자운영이어서 근로 조건 개선의 여력이 없다고 발뺌을 했다. 그러다 마지못해 자구책으로 나온 것 중 하나가 직원과 가족의 열차 "무료 패스'였다. 이것만 있으면 전국 어디로 가든 무료로 승차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직원과 가족에 한해 쓸 수 있다.'라는 규정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단속을 하고 징계를 주어도 이웃사촌과 사돈의 팔촌까지 '파스'를 빌리려고 혈안이었다. 철도 가족도 적당한 사례비까지 챙겨 받으니 이 '파스(일반인은 패스를 이렇게 불렀다.)'야 말로 큰 유세이자 유혹의 대상이었다. 1970년 되어서야 임금체제와 '파스'에 대한 개선책이 나왔지만, 여전히 철도가족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철도에 막 입사한 이병기(남, 70,2014년) 씨는 역전에 즐비한 식당을 이용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워낙 임금이 박하다 보니 우리는 구내 '후생식당'이나 '구내식당'에서 주로 국수나 해장국을 먹었어요. 선술집인 '월남집'도 자주 갔지만, 잔 막걸리에 안주는 깨소금이 전부였어요. 시래기국밥을 먹을 때도 잔 소주를 마셨고, 어쩌다 송종시장에 들어가 순대안주를 먹으면 1원 한 장까지도 이른바 '더치페이(비용 각자 부담)'로 부담을 줄였어요. 오죽하면 역전 당구장에 가서도 내가 당구 한번 못 치고 구경만 했어요. 그런데 당구에 눈길이 가는 게 아니라, 큐대를 감싼 손목에 걸쳐 있는 시계에 눈길이 갔어요. '저 귀한 시계를 나는 언제 한번 차 보나!' 하며 부러워했지요.
그리고 철도가족 중 색시가 있는 관이나 옥에서 술 마시는 동료도 있었어요. 그들은 대부분 사무실 경리나 인사, 노조 쪽에 근무한 사람이었어요. 인사나 노조 간부들이야 인사철에 고마움의 표시로 술 한 잔 마실 수 있었지만, 경리 쪽은 슬픈 사연이 있었지요. 당시는 누구나 가난하니 집안에 돈 쓸 일이 생기면 '공제'돈을 썼어요. 그런데 영주지방청까지 본인이 직접 가야만 처리되었어요. 결근까지 하고 갈 수 없으니 한 달에 한 사람씩 했지만 결국 안 달에 보통 수십 명에게 편리를 봐주었으니 그 사례비가 장난이 아니었지요. 지금도 당시 철도에 다녔던 사람들이 왕소금인 이유는 워낙 짜게 사는데 인이 박혀 그래요, 요새 철도(코레일)에 다니는 후배들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지요."
모두 가난에 익숙하던 6,70년대 송정의 악동들은 그 가난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그 대상이 '기관고'(기관차 정비고) 일대였다. 악동들은 철로 옆으로 난 길로 가지 않고, 꼭 철로를 가로질러 기관고 앞으로 해서 학교에 갔다. 그들은 이미 레일 틈 사이에 대못을 놓았다가 기차가 지나간 뒤에 쫓아가 납작해진 못으로 칼을 만드는 수준 낮은 단계를 벗어나 있었다. 악동들은 하교 때 기관고로 가 세워져 있는 객차부터 훑었다. 그들의 목표는 청소 안 한 객차였다. 재떨이를 먼저 뒤져 장초를 찾는 게 첫째이고, 의자 밑을 뒤져 동전을 줍는 게 두 번째였다. 운 좋은 날은 양담배도 갑째로 줍기도 했다. 그들은 어른처럼 담배를 피우며, 더 큰 음모를 꾸몄다.
다음 목표는 레일 고정 '못'이었다. 처음은 몇 개 뽑는데도 한창 걸렸지만 능숙해지면 순식간에 몇십 개를 뽑았다. 담이 커지면 다음 대상이 기관차 수리 창고 앞으로 쭉 놓아둔 브레이크 라이닝이었다. 놓아둔 게 없으면 쇠바퀴에 부착된 핀을 뽑으면 빠졌다. 무찔한 쇠뭉치를 안고 도둑고양이처럼 레일을 가로질러 울타리에 숨겼다가, 고물상에 갖고 가 팔았다. 여기 까지는 악동으로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들 중 한 악동이 열차연결고리를 훔치다 보안 직원에게 붙잡히고, 지서에 넘겨져 퇴학까지 당하고 말았다. 당시 기관고에 근무했던 이병기 씨는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화물열차 낀 무연탄 모아 연탄 만들고 난방!
"기관고 뒤에 증기기관차 연료로 쓰는 조개탄 공장이 있었어요. 무연탄에 벙커C유 찌꺼기를 썩어 만들었는데, 회사 이름이 '동광연료'이고 공장 옆에 목욕탕도 있었지요. 이 조개탄은 벨트에 실려 저장고로 갔다가 기관차 연료칸에 실렸는데, 늘 역한 냄새와 푸른 연기가 났어요. 기관고 위에는 기관자 머리를 돌리는 시설이 있어, 무연탄을 실은 화차가 늘 대기 중이었어요. 어둑해지면 송정의 억센 아주머니들이 대야를 들고 나타나, 화차 문에 끼어 있는 무연탄을 긁어 담았어요. 어떤 때는 철로 자갈에 떨어진 탄 덩어리를 바구니로 체를 쳐 담거나 아예, 화차 위까지 올라갔어요.
그러다 공안 직원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면 급히 내려오다 떨어지거나 엎어져 다치기도 했지요. 그들은 상처 난 몸으로 도망가기 바빴어요. 탄가루는 당시 '대동연탄' 집에 가져가면 두 장정이 진흙을 섞어 반죽해 틀에 넣어, 한 사람은 메로 내리치고 한 사람은 틀을 들어 올려 1 9공탄을 만들어냈어요. 끄 대 붙지 말라고 톱밥을 뿌렸고 보통 2장이나 4장이 나왔어요. 그러면 새끼로 끝에 매듭을 해 집으로 갖고 가 밥도 하고 난방도 했어요."
참고문헌_이야기가 있는 송정, 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