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마지막 근대농업유산, 용산정미소
동해시 쇄운동의 용산정미소는 최근까지 운영된 마지막 근대 농업유산으로 이세필이 세운 ‘용산서원‘바로 옆(동해시 쇄운동 200-1)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정미소는 1940년대 삼화철산이 들어서던 시기에 김형욱 씨에 의해 설립된 정미소로 당시 지역의 지리적 배경과 농경문화를 잘 보여주는 공간으로 최근까지 운영된 시설이라 대부분 원형이 잘 보존 돼 있다. 1979년 김동순(남, 1937년생)씨가 인수해 운영하다가 지금은 돌아가시고 아들인 김석현(남, 62)씨가 최근까지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미소는 도정공장이라고도 하며, 벼, 보리 등 곡물을 가공하는 시설. 일반적으로 현미기, 현미분리기, 정미기, 계량기 등 일련의 기계를 갖추고 있다. 최근에는 건조, 저장에서 부터 포장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자동화 현대화한 시설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를 미곡종합처리장(RPC)이라고 한다. 특히 용산정미소는 당장 전기만 공급한다면 작동될 만한 시설로 당시 마을의 생활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근대 생활문화유산으로 보존의 가치가 충분한 장소며 시설이고 공간이다.
용산정미소 시설 문화재생을 위해 위탁 관리 운영하고 있는 홍협(남, 62, 동해학기록센터 연구원)씨는 “사라져 가는 근현대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은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며 "향후 시설과 포토존 조성 등 주변을 정비하고 근대 마지막 농업문화유산을 알리는데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동해학기록센터 홍협 연구원은 근대 농업 마지막 유산, 용산정미소의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는 생활 속에 주식 부식이라는 말을 써왔다. 오랫동안 우리 민족은 쌀과 보리로 대표되는 잡곡은 우리의 기초 양식이었다. 과거 쌀이 귀한 시절 주로 보리밥으로 대표되는 잡곡으로 생활하다가 제례, 혼인, 생일, 명절등 특별한 날은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곡식은 가공을 해야 하는데 과거의 방법 중 하나는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등 인력과 수력에 의해 곡식을 가공해 왔다. 근대에 들어와 보다 대량으로 가공하기 위해 정미소가 등장하였다. 엔진(당시 발동기)을 이용하여 커다란 축에 피대(벨트)를 걸고 동력을 전달시켜 벼의 껍질을 까고 도정하며, 잡곡의 표면을 갈아 부드럽게 도정하던 주민들에게 제공하는 꼭 필요한 곳이었다.
지금은 RPC(미곡종합처리장)에서 대형으로 도정을 하지만 당시에는 마을마다 정미소가 존재하여 우리들의 이웃과 같은 존재였다. 또한 쌀을 갈아주면 가정에서 떡을 만들다가 아예 정미소에서 떡을 제조하기도 하였다. 이제는 시장에 가면 떡 방앗간만 많이 존재한다. 우리 민족 인류가 살아가면서 필수적인 곳이 정미소였다. 그러나 이제 옛 추억의 정미소는 볼 수가 없다.
커다란 축에 걸려 피대(벨트)로 연결하여 힘차게 작동되던 모습들이 훤하다. 지금 이곳 용산정미소는 마치 타임캡슐을 타고 역사 속 과거로 돌아가 있는 모습이다. 발동기를 모터로 바꿔 지금 당장이라도 전기만 공급해 스위치를 켜면 힘차게 돌아갈 것 같은 모습이다. 마치 심장이 힘차게 고동치는 모습이다. 우리 지역에도 이런 옛 추억의 농업 유산이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
동해문화원 동해학기록센터는 지난 4월 22일 ‘용산정미소’ 시설을 공개했다. 공개 기간은 2023년 동해시 북삼동 마을축제 <효행제> 개최 기간인 22일과 23일 양일간으로 위치는 행사장 <용산서원> 좌측 정미소 현장이다. 심규언 동해시장과 이동호 시의회 의장과 시의원, 사진작가를 비롯한 많은 가족단위 시민이 정미소 현장을 방문했다. 양일간 정미소 해설은 홍협 동해학기록센터 연구원이 담당했다.
동해시 북삼동의 마을 축제인 '효행제'와 함께 공개 전시한 용산정미소, 양일간 해설을 담당했던 홍협 (동해학기록센터 연구원) 씨에게 전시 해설 소감도 추가로 들어봤다.
"동해시 북삼동 용산서원 뜰에서 개최된 마을축제 '효행제' 기간 중 지역 생활문화와 애환을 담은 '용산정미소'를 정비하고 기간 중 공개 행사를 개최했어요. 강릉 산불을 발생시켰던 바람은 동해에서도 큰 피해를 가져왔는데 용산 정미소도 함석지붕이 날아가 버렸죠. 이 불을 계기로 철거 위기에 놓인 정미소를 정비해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시설 보존에 대한 공감대를 얻고자 공개하게 됐죠.
수십 년 묵은 때를 벗겨내고 조명을 설치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행사 하루 전 드디어 오픈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과연 사람들이 찾아와 줄까? 걱정을 했는데, 과거의 향수를 가지고 오랫동안 벼와 보리의 방아를 담당한 정미소는 기대와 달리 주민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아직도 그대로 있네!', '내가 여기서 쌀을 찧어왔었는데 이제 주변에 없어서 너무 불편하다!' 등 추억의 시간을 소환하는 시간으로 충분했다.
도대체 용산정미소 역사가 언제인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지금 운영하는 대표는 1976년에 아버지가 인수하여 지금까지 함께 운영하다 돌아가신 후 혼자 운영을 하다가 2017년경 정미소 가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김용욱 씨가 운영했고 그 이전은 기억이 없다.
마을 어르신들의 증언에 의하면 80대 어르신들도 어릴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어떤 분은 이곳에서 제일 먼저 생긴 정미소라며 100여 년 되었다고 뀌뜸한다. 아마 이곳의 앞 벌판은 넓은 들을 가지고 있기에 정미소가 꼭 필요했던 곳으로 보인다.
기록 사진 출사로 축제장을 방문한 중년의 여성 사진작가는 '오! 이런 곳이 아직 남이 있다니 대박이다!' 하며 사진 찍기에 몰두했다. 또,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많은 부모들은 처음 본 시설에 관심을 보이면서 이곳이 어떤 공간인지를 모르다가 설명을 듣고는 '아! 매일 우리가 먹는 쌀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면서 천진난만한 모습들을 보여주곤 했다.
정미소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가장 오래된 모습들은 건물의 구조와 동력원을 전달하는 축과 휠이다. 초기(약 1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쌀 정미기와 보리정미기의 연결통은 당시 철판이 없어 드럼통을 두들겨 만든 형태이며(45-50년대) 그 표면에는 도착항이 PUSAN이라는 글씨도 남아있는 시대 적 산물이며, 정미소 전체가 아직도 가동이 가능한 잘 보존된 상태이었다.
쌀은 우리 민족의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다. 동력원이 없던 시절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로 대표되던 곡식을 찧던 시절이 발동기라는 동력원이 개발된 후 근대적인 정미소가 곳곳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런 정미소도 추억 속으로 사라지며 원형에 가까운 모습은 보기 힘들다. 그나마 우리 지역에서 곁에 아직 남아있는 '용산정미소'의 새로운 탄생의 기대감과 그의 생명 모두는 우리 세대가 함께 고민해야 할 우리 숙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