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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y 14. 2023

감추고 싶은 감추甘湫 이야기!

47. 브런치스토리와 떠나는 동쪽여행

선화공주 설화를 품은 감추사


<감추사>湫寺의 창건 설화는 향가 <서동요>의 선화공주가 등장한다. 공주는 백제 무왕과 결혼했으나, 백풍병(폐가 줄어들어 늘어나지 않는 질병)에 걸려 백약을 썼으나 낫지 않았다. 마침 익산 <용화산>에 머물던 지명스님이 동해안 <감추>로 가서 요양을 해보라고 권했다. 선화공주는 <감추>에 있는 자연동굴에 불상을 모시고, 절벽 밑의 <용소>龍沼에서 매일 목욕재계를 하고 3년 동안 기도하였다. 그 정성에 기적같이 병이 낫자 공주는 부처 은덕이라 여겨 <감추사>를 지었다. 또, 노후에 공주는 다시 <감추>로 와 부처와 용왕에 대한 보은을 기리다 이곳에 묻혔다.


그 후 <감추사>는 해일에 피해를 입어 오랫동안 폐사되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용장>龍場에 큰 사건이 생겼다. 곳은 신라 때 선화공주가 목욕재계하던 <용소) 옆에 있던 포구였다. 어느 날 용장에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왜색 복장을 한 선원들을 보고 주민들은 왜구가 쳐들어왔다고 관아에 보고했다. 부사는 즉시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죽이고, 조정에 보고했다. 선조는 수상히 여겨 어사 노경임에게 명하여 재조사를 하게 했다. 그 결과, 죽은 선원들은 왜구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고향에 돌아왔던 조선인임이 밝혀졌다. 부사와 주민들은 그들이 갖고 온 보물을 나눠 가졌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조정은 부사를 비롯해 잘못 보고한 주민들을 잡아 영월, 간성, 원주 등지의 감옥에 가두었다. 주민들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번 진정하고 탄원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이들 모두 모진 고문과 6년간의 긴 옥고 끝에 죽고 말았다.

감추사, 사진_ 동해문화원 DB

<감추사>는 1902년 <신건암>, <대은사분암> 등으로 유지되다, 1959년 해일이 덮쳐 또다시 석실과 불상이 유실되었다. 현재의 <감추사>는 1965년 장인학이 중건했다. 관음전, 삼성전, 요왕각, 요사채 등이 있고, 신도 박복수(전 태도치과 원장)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아담한 오 층 석탑을 세웠다. 또, 김해김 씨와 허 씨 양 문중에서 감추 입구 언덕에 정자를 세워 <옥석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정자는 주위 풍광에 어울린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아왔으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사라졌다.


절 입구 바위에서 흐르는 약수는 관절이 아프고, 팔다리가 저리고 붓는 습병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감추사>로 가는 길은 도애 천곡 해안 철로를 건너 계단을 내려가면 해변이 나타나지만, 외지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토박이만 아는 감추어진 해변이었다. 감추는 기암괴석으로 싸인 절벽이 서쪽을 숨기듯 감싸고, 해변 곳곳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파도를 맞고 있다. 천곡에 사는 주민들은 국도와 철로 및에 아름다운 해변과 절이 감추어져 있다는데 자부심을 느낀다. 외지인이 영원히 모르게 본인들만 찾는 해변이기를 바란다.

감추사, 사진_ 동해문화원 DB

낚시로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를. 감성돔 낚시 명소, 감추

감추의 또 다른 매력은 낚시다. 낚시 광들이 은밀하게 찾는 항포구로 유명하다. 이유는 낚시터가 숨겨진 특징이 있고, 기암괴석과 반석이 많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감성돔이 늦봄에서 여름까지 제법 잡혔다. 한 때 이곳에 매일 낚시를 하던 이경락(남, 72,2016년)씨가 고기보다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를 낚았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무엇보다 감추에 가면 조용했어요. 들리는 건 파도소리뿐이죠. 가끔 기차 소리도 났는데 조용한 음악으로 들릴 정도로 분위가 좋은 곳이죠. 낚시는 주로 동해안 어디서나 잡히는 망상어, 놀래기는 기본이고 귀한 감성돔이 많이 잡혔어요. 강태공 사이에 알려진 사실이지요. 나는 낚시보다 사는 게 힘들 때 주로 감추로 가요. 경치 또한 딴 세상 같아 세상만사 잊는데 최고죠. 가는 길도 만만하지 않지요. 용정 쪽의 남쪽에서 철길을 건너 좁은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가다, 비각을 지나면 바로 경동지괴(땅이 한쪽 부분만 오르거나 내려가서 경사가 급한 절벽) 현상의 대표적인 기암절벽이 나타나지요. 어렸을 때 겁 없이 절벽에서 다이빙하다 숨이 막혀 죽을 뻔했던 적도 있지요. 옛날 후리어업을 할 때 망을 보았다는 망제는 철길 옆에 있고, 김장할 때 배추를 씻었던 김장바우 등은 다 동해항 매립지 공사 중에 없어졌어요.


기우제를 지냈던 용추, 굿판을 벌이던 무당바위, 배 대기 쉬운 <뱃굼>은 아직 그대로 있지요. 발길을 멈추고 아무 바위에 앉으면 해군 골프장의 푸른 잔디가 보이고, 동해항 외항에 대기 중인 여러 척의 외항선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면 걱정거리가 진정되고 잡념이 없어져요. 하루는 너럭바위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데 갑자기 너울성 파도가 나를 덮쳤지요. 그대로 바다에 빠져 허우적댔는데, 약수 마시러 온 주민에 바다에 뛰어들어 나를 구해주어 죽다 살아난 적도 있지요. 동해안도 조수간만 차이가 있다는 걸, 감추에서는 쉽게 볼 수 있지요. 어떨 때는 1m 이상이 차이가 나요. 감추사 앞의 크고 작은 바위에는 섭, 따개비, 미역이 지천이지요. 어느 해 봄에는 다시마가 물보다 많이 파도를 타고 해안에 나온 적도 있지요. 감추해변은 용정, 송정, 천곡 사람들이 여름이 시작되면 쉽게 찾지요. 세상에 5분 만에 가는 해수욕장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이에요?"

감추사 기도터, 사진_ 동해문화원 DB
제1회 동해해양문학상을 수상한 정민(남, 49,2016년)은 단편소설 <동해, 여름 바다의 꿈>에서 감추바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감추바다를 만났다. 철길을 내려가니 절이 나왔다.

바다와 바로 접한 절벽 속에 파묻혀 있는 모습으로 지어진 작은 절

신라시대에 지어졌다는 유서 깊은 감추사

절 옆으로 작은 해수욕장이 펼쳐졌다.

열댓 명이 앉으면 꽉 찰 해수욕장의 뒤는 바위 절벽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절벽, 감추 해변은 움푹 들어간 모습이었다.

음기가 강한 터가 분명해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감추 해변은 무당이 많이 와, 기도빨이 잘 받는 곳이라는데? 이름 모르는 무당에게 들었어. 망자의 유골을 뿌리러 오는 이들도 종종 보이지, 어스름한 저녁 무렵 작은 초에 불을 밝히고 망자의 명복을 비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는 바다가 바로 여기야."


감추의 <용왕기도>는 무속인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소위 <기도빨>이 잘 들어 전국에서 몰려들어 기다릴 정도였다. <감추사> 측에서도 처음엔 무속인의 출입을 금하느라 분쟁이 심했으나,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태고종 종단에서 열악한 절 재정에 큰 보탬이 된다는 보고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아예 절 앞에 용왕기도실을 마련했다. 무속인에게 기도 중에 소요되는 가스, 초, 숙식비, 식대 등을 받았다. 그들도 편리한 교통, 기도가 잘되는 자연경관, 일반인의 따가운 시선 등도 없이 오직 기도에 전념하니 일거양득이었다.

참고문헌_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천곡, 글 홍구보, 기획 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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