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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연섭 May 21. 2023

구술 3인 3색,  북평성당!

7. 브런치스토리로 떠나는 글 소풍

3인 3색의 기억, 북평성당

국가등록문화제 제795호 동해 북평성당은 1959년 <구 고르넬리오> 신부가 건립한 시멘트 블록 건물이 다. 전 국토가 황폐화되다시피 한 전쟁의 참화 속에서 도 온전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더불어 건축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겪기 마련인 인간관계의 단절 극복을 위해 지역민들에게 신앙생활 터전을 제공하고 공동체 쉼터 역할을 이행한 공간이다. 고딕식 건축물로 성당 내부 에는 북평성당 본당과 사제관, 교육실, 수녀원이 있으며, 본당 앞마당에는 성모상이 있다.

북평성당 성모상, 사진_조연섭

영동지역 최초의 성당은 1921년 구정면 금광리 본당이고, 1934년 강릉시 임당동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8년 묵호성당, 1940년 삼척성당이 건립되었다. 6.25가 발발하자 인민군 지도자는 성직자들을 연행하고 살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묵호성당의 <라 파트리치오> 신부와 삼척성당의 <진 야고보> 신부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북평읍 취병산 앞 마을(쇄운리)에는 신유박해((1801년, 순조 1년) 때, 천주교 탄압을 피해 이주한 다수 주민들이 옹기를 구우며 살았다.

북평성당, 사진_조연섭
마을 출신 배종국(남, 76,2018년)씨가 6.25 전후 성당의 모습을 들려주었다.

"우리 집안의 조상들은 경기도 여주에서 주문진을 거쳐 쇄운리로 이주했어요. 아버지 3형제(배한복, 삼복, 만복) 모두 이웃에 살았고, 옹기를 구웠어요. 묵호성당에는 너무 어려 못 다녔고, 삼척성당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다녔는데, 2학년에 6.25가 났지요. 당시 취병산 중간쯤에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 이도리로 갔는데, 1.4 후퇴 때 국군이 퇴각하며 폭파했어요. 1킬로미터 떨어진 우리 집까지 진동이 있을 정도였고, 지금은 그 기초도 없어졌어요.


일요일 꼭두새벽이 되면 동네 전체가 환했어요. 관솔불에 불을 밝히고 줄을 서서 다리를 지나 고사리재에 올라요. 산에 나무가 없어 거기서도 삼척 시내가 훤히 보였어요. 지금은 법이 많이 완화되었지만, 그때는 교회법이 엄해 영성체를 받은 다음이라야 밥을 먹을 수 있었어요. 밥이라고 해도 감자 넣은 보리밥에 고추장 한 숟가락이지만 새벽부터 집을 나선지라 미사가 끝나는 12시까지 참는다는 게 엄청 힘들었지요. 전쟁이 나자 당시 공소회장을 역임했던 배삼복 삼촌과 여러 신자들이 진 야고보 신부에게 피난을 종용해도 성당을 지킨다며 불응했어요. 그러자 민청연이 성당으로 들어와 십자가를 철거하고, 인공기를 다는 등 행패에 시달렸는데, 결국 퇴각하는 인민군 패잔병에게 끌려가다 <자지리> 하천에서 총살당하고 말았어요. 묵호성당의 라 파트리치오 신부는 망상 만우에 사는 남봉길 전교회장 집에 피신했는데, 한 달 만에 발각되어 강릉으로 이송 중 <밤재>에서 인민군에게 총살되었어요. 두 외국 신부는 한국 신자들에게 희망과 복음을 전하려고 왔었는데, 젊은 나이에 희생되었지요. 당시 만우의 남봉길 회장과 배삼복 삼촌은 친사돈 관계로 남 회장의 딸 삼복 삼촌의 며느리 었어요."


휴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나자, 춘천 교구의 <토마스 퀸란> 주교는 쇄운리와 북평지역에 거주하는 신자들을 취한 성당 건립에 착수했다. 먼저 부지 선정에 착수해, 배삼복 회장과 상의를 거쳐, 북평장터 옆의 땅 1,665평을 구입했다. 드디어 1958년 북평성당이 신축되었다. 당시 묵호, 삼척, 북평 세 성당 모두 춘천교구 관할이었는데, 1965년부터 원주교구가 생겨 삼척과 북평성당이 이관되었다. 추병산 앞 쇄운리 마을은 배 씨를 비롯해 최 씨, 홍 씨, 김 씨 등이 살았고 80%가 천주교 신자였다. 이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옹기 굽는 일에 주로 종사했는데 그 이유는 성경과 서류를 옹기 안에 감추고, 가마에서 기도하고 성서를 읽기 위해서였다. 옹기를 구울 때 쓰는 나무는 제무시(GM트럭) 다니는 무릉계와 설운골에서 조달했고, 흙은 단실에 가서 직접 구르마에 싣고 왔다. 옹기를 빚어 가마에 한번 구워내면 1,000여 개에 달할 정도로 생산량이 많았다. 소비는 영동지역은 물론 영서지방과 탄전 일대까지 옹기를 충당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 가볍고 질긴 플라스틱 용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자, 옹기 소비는 급격히 감소했다.


토마스 주교는 당시 울진서 묵호까지 성당을 짓고 보수하던 중국인 <가>씨에게 신축을 맡겼다. 좁은 장터에 이미 감리교회 장로교회가 있었는데, 천주교회가 들어서자 주민들은 좋지 않은 시각으로 보았다. 그러나 <구고르넬리오> 신부가 부임하고 미사를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북평성당에서 제일 먼저 영세를 받았던 김기원(남, 79,2018) 씨가 그 시절 기억을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데, 하루는 이웃집에 사는 김영자 누님 집에 갔어요. 누님의 손목에 처음 보는 묵주가 있길래 <어디서 났냐?> 고 물었더니, 천주교회에 가면 준다고 했어요. 누님은 몇 년 후에 북평성당 최초로 수녀로 가셨고, 2018년 당시 서울의 <성바오로딸수도회> 원장수녀로 계셨지요. 나는 단순히 그 군용 묵주가 탐이 나서 갔는데 곧, 신자가 되었어요. 영세받는 절차도 재미가 있었고, 외국인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는 자체가 좋았어요. 그런데, 다수 사람들은 480 구제품(미국의 농업수출진흥법 및 원조법)을 받는 재미로 나왔어요. 구제품을 우리는 <악수표>라 불렀는데, 제품마다 두 손이 악수하는 그림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새겨진 마크가 있어서였지요. 밀가루가 제일 많았고 분유, 옥수수가루, 신발, 원단, 옷, 버터도 있었어요. <구제품을 교회보다 성당에서 더 많이 내준다더라>, 소문이나 나자 신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많이 찾아왔어요. 성당이 꽉 차는 것도 모자라 문 밖까지 줄이 이어지니, 미사도 못 볼 정도였어요. 성당 측에서 어쩔 수 없이 새 방법을 모색해서 구제품을 내주는 방식을 바꾸었어요. 즉, 무조건 주는 방식에서 영세를 받거나 성가대에 참여하면 조금 더 주고, 이때마다 1/10을 따로 모아두었어요. 모아 둔 것을 읍사무소에서 극빈자와 장애인 주소를 파악해,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나누어 주었어요. 그런데, 갈 때마다 길을 막고 <저 집이 우리 집 보다 잘 산다) 며 항의를 했어요. 읍사무소 차원에서 겟목의 할미바위로 내려가는 길을 닦는데 부역한 사람들에게도 구제품을 나누어주었는데, 창고가 우리 성당에 있다 보니 매일 복작거렸어요."


북평성당 학생부와 청년회는 성당의 환경정비에 스스로 가담했다. 전천에서 리어카로 자갈과 모래를 싣고 와 마당에 깔고, 회화나무와 향나무를 곳곳에 심었다. 향나무는 구호마을 청년들이 힘을 합쳐 우차에 싣고 왔는데, 수고비는 구제품으로 대신했다. 성당 내부 바닥은 마루를 깔고, 장괘(기도할 때 무릎 꿇는 의자)는 가구점에 의뢰해 마당 한 편에서 제작에 들어갔다. 신자들은 일일이 나무에 니스를 바르고, 안으로 옮겼다. 또, 마당에 깐 자갈로 인해 구두코가 까인다는 하소연이 많아지자, 만경대 앞 굴개에서 잔디를 파와서 심었다.

계속해서 김기원 씨는 60년대의 북평성당 중흥기에 대한 기억을 들려준다.
가난 퇴치 운동과 북평성당 발전에 기여한 신현봉 신부

"초창기는 주로 아일랜드 출신의 신부와 외국 수녀가 많이 부임하셨어요. 특히 우리 성당에 여성 신자들이 많았는데, 이 이유는 수녀님의 검은 옷과 두건이 동정녀 마리아를 연상시켜 많은 여학생들을 신자의 길로 이끌었지요. 60년대 중반이 지나서 신현봉(안토니오) 신부님이 부임하셨어요. 성당에서나 출타하실 때도 늘 바지저고리를 입으셨어요. 신부님은 가난 퇴치 운동의 일환으로 <가톨릭 농민회>를 만들고, 성당 뒷밭에 양돈장과 앙고라토끼장을 만들어 운영했어요. 삼척군으로부터 우리 성당이 <군 종돈장> 지정을 받을 정도였지요. 그때까지 각 가정은 흑돼지 몇 마리를 길렀는데, 신부님이 강화도에서 가지고 온 흰 돼지로 인해 돼지 사육을 전문적으로 하는 농가가 많이 늘었어요. 흰 돼지는 크고 새끼를 많이 낳다 보니 새끼를 서로 가져가려 하는 농가가 많았지요. 삼화 파수꾸미, 용정 숫골 등지에는 큰 양돈장이 있었어요. 우리 성당에 시작된 양돈이 점차 커져 사료 전문 판매점까지 생겼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양돈은 성공했지만 앙고라토끼 사육은 실패했어요. 번식력과 식성이 엄청 좋아 사료를 미쳐 준비 못할 정도였어요. 고심 끝에 성당 마당의 잔디밭에 클로버 씨까지 뿌려 먹이로 사용했는데, 갑자기 앙코라 털 수출이 중단되는 바람에 잔디밭만 만지고 말았지요. 신현봉 신부는 북평성당에 재임할 때 가난 퇴치, 소득 증대와 농민회 장려 등에 적극성을 보였는데, 70년대 중반 이후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 참여해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구속되는 등 험난한 사제의 길을 걸으셨지요."

특징 있는 건축양식과 종탑지붕 특징

북평성당의 건축양식은 단아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창문은 아치형이었다. 성당의 백미는 뾰족한 종탑 지붕이다. 북평성당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많은 주민들에게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밤이 되면 종탑 지붕의 십자가에 화려한 불 빛이 꺼졌다, 켜졌다 하였고 여운이 길게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주민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당시의 신기한 전깃불 점등과 타종에 대해 김원정(남, 81,2018년) 씨가 회상했다.

"우리 성당의 형제자매 중에 대한중석 상동광업소에서 전기기술자로 근무했던 분이 계셨어요. 이 분이 둥근 나무판에 동판을 붙여 모터의 힘을 이용해  회전을 시켰어요. 수백 개의 꼬마전구에 일일이 전선을 연결하고, 동판이 회전하며 붙였다 떨어졌다 하게끔 설치했어요. 그리고 모터에 전원 스위치를 넣으면 나무판이 회전하며 십자가에 달린 전구에 점등이 되었다 소등이 되었다 했어요. 하늘 높이 있는 종탑의 십자가에 돌아가며 불빛이 켜지는 모습은 멀리서도 하늘의 별처럼 선명하게 보였어요. 또 종탑은 성당 내부로 빛을 흡수하고, 종소리가 멀리 퍼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어요. 프랑스에서 만들었다는 종 표면에 성화가 조각되어 있었고, 이 무거운 종을 종탑에 올릴 때 엄청 위험했어요. 종탑에 원목을 우물 정자로 차곡차곡 쌓으며 그 꼭대기에 종을 매달았고, 굵은 로프를 아래로 내려뜨렸지요. 예전에는 매일 삼종 즉, 오전 6시와 12시, 오후 6시와 미사 알리는 시각에 꼭 종을 쳤어요. 종을 칠 때 요령이 있어야 했는데, 처음에 종과 이어진 밧줄을 틀어쥐고 힘을 최대한 들여서 당겨야 소리가 제대로 났어요. 안 그러면 종소리가 약하지요. 그런데, 이제는 사람마다 시계를 차고 있고, 종소리가 추억의 소리가 되었고 일종의 소음 공해로 인식되어 일요일 미사 전만 33번 치지요. 힘이 들고 요령이 필요해 저와 최기순 교우가 번갈아 치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는 신축 성당에 종탑을 아예 설계하지 않아요. 종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성당으로 찾아왔던 예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요."

북평성당,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지로 유명

북평성당은 <쌍용 C&E동해공장>이 있는 삼화에 삼화공소를 건립(1978년)했다. 또, 명주군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이 합쳐 동해시가 탄생(1980년)되자, 신도시로 개발된 천곡동에 본당을 신축(1992년) 분리했다. 북평성당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2003년에 방영된 드라마 <겨울연가> 때문이었다. 첫사랑으로 엮인 세 남녀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그렸는데 북평장터, 북평성당, 추암바다가 배경으로 나왔다. 주인공 강준상(배용준)은 사랑하는 애인 정유진(최지우)이 자신과 남매 사이라는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되자, 동해로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말한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유진과 <북평성당>을 찾아가 둘만의 결혼식을 하려고 성혼서약을 하는데, 유진을 사랑하는 김성혁(박용하)이 성당으로 들어와 막무가내 손을 잡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나왔다. 이 드라마는 배용준의 <욘사마 신드롬>을 일으켰고, 실제로 일본의 중년 주부단체 회원들은 합동으로 동해, 삼척을 방문하는 등 북평성당과 배우 배용준을 비롯한 배우들은 큰 인기를 끌었다.

겨울연가 북평성당. 사진_영상캡쳐
참고문헌_동해문화원 8년의 기록, 이야기가 있는 북평, 글 홍구보, 기획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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