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동해학 아카데미
22일, 동해문화원이 주관한 ‘ 2025년 동해학 아카데미’ 제3강에서는 '민간이 간직해 온 기록 유산의 공공성과 역사적 의미'를 조명했다.
강사로 나선 박원재 율곡연구원장은 “한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기록은 공동체가 품어야 할 역사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는 고문서, 일기, 교지 등 민간기록의 다채로운 형식과 쓰임을 통해, 국가중심의 역사 서술이 놓치기 쉬운 생활의 결을 되살려야 한다며 민간 기록은 '지역학 완성'의 뿌리라고 강조했다.
강의에서는 ‘자매문기’, ‘소지’, ‘분재기’와 같은 낯선 이름의 문서들이 차례로 소개됐다. 대부분 개인이나 문중에 보관되어 온 자료들로, 국왕의 명령서부터 과거 시험 답안지, 심지어 자기를 팔아 연명을 도모했던 여성의 고백서까지 그 종류가 방대하다.
박 원장은 “이 문서들은 단 하나뿐인 유일본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공식 기록이 빠뜨린 사적 진실, 민초들의 삶의 궤적이 담긴 보물”이라고 말했다. 국왕의 교지보다, 묘지를 둘러싼 민간인의 분쟁 기록이 오히려 한 시대의 일상과 정서를 더 생생히 보여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박 원장은 “민간 기록은 지역의 언어로 쓰인 역사”라며, “지역사 복원 핵심 자료로, 지역 정체성과 문화 분권의 토대가 된다”라고 말했다. 또한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이 구축한 ‘스토리테마파크’ 사례를 언급하며, 기록을 기반으로 콘텐츠를 발굴하고 지역 문화 산업과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민간 기록은 단순히 과거를 박제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재의 창작과 교육, 관광 자원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자산이라는 논지다.
동해문화원이 5년째 추진하는 ‘동해학아카데미’는 이러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단편적인 역사 지식보다 지역민의 체감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억의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것이 문화원의 기획 방향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현재 대다수 민간 기록은 개인이나 문중 단위로 흩어져 있으며, 보존 상태 또한 열악하다. 박 원장은 “공공 기관 소장 유산은 일정한 체계로 관리되지만, 민간 기록은 방치되거나 폐기되는 경우가 많다”라며, 국가적 대응의 시급함을 지적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002년부터 ‘국학진흥정책 기반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권역별로 국학기관을 지정하여 자료 수집과 아카이빙을 진행 중이다. 강원권은 2020년부터 율곡연구원이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박 원장은 “지역마다의 학문적 주권이 기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며, 강연 말미에는 동해문화원과의 협업 가능성도 언급했다.
오종식 동해문화원장은 “기록이야말로 문화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라며, “앞으로 문화원은 지역의 민간 기록 수집과 아카이브를 통해, '동해학'의 실천적 토대를 넓혀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