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노트_ 동쪽여행
지난 27일, 교수 출신 언론인과 지인 몇 분의 우연한 만남이 있었다. 유유자적 열차 여행을 즐기시며 싱싱한 회를 맛보는 모습이 부럽다는 필자의 인사에 한 어르신께서 독특한 미소와 함께 “직장인이 '다이아몬드'라면, 퇴직자는 '녹슨 철'”이라는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다.
얼핏 들으면 퇴직 후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토로하는 자조 섞인 말로 들릴 수 있지만, 그 속에는 현직에 있는 후배들을 향한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조언이 담겨 있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다이아몬드는 그 자체로 단단하고, 영롱하게 빛나며, 모두가 그 가치를 인정한다. 직장인, 특히 한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이들은 바로 이 다이아몬드와 같다. 조직의 이름과 직위라는 세공을 통해 그들의 능력과 전문성은 더욱 빛나고,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넘쳐나고, 그들의 결정 하나하나에 많은 이들이 귀를 기울인다.
반면, 녹슨 철은 어떤가? 한때는 단단하고 유용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면 이내 붉은 녹이 슬고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린다. 어르신의 말씀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퇴직과 함께 조직이라는 울타리와 직위라는 빛나는 명함을 잃는 순간, 스스로를 단단하게 유지하고 갈고닦지 않으면 사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녹슨 철처럼 쉽게 잊히고 무기력해질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현재 우리의 직장 생활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녹슨 철’이 아닌, 퇴직 후에도 여전히 빛나는 ‘원석’ 혹은 잘 세공된 ‘보석’으로 남을 수 있을까?
첫째, ‘나’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회사의 직함이나 조직의 이름이 아닌, ‘나’라는 사람 그 자체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통해 전문성을 심화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해야 한다. ‘〇〇조직의 국장’이 아닌, ‘〇〇분야의 전문가 OOO’으로 불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조직을 떠나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둘째, 일과 삶의 균형 속에서 다채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만 매몰되지 말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인적 네트워크를 넓혀야 한다. 취미 활동이나 동호회, 봉사활동 등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고, 일터를 떠나서도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퇴직 후 사회적 고립감을 막아주는 든든한 안전망이 될 것이다.
셋째, 경제적 안정과 정신적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 퇴직 준비라고 하면 흔히 재정적인 부분만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정신적인 준비다. 매일 출근하던 곳, 몰두하던 일이 사라졌을 때 밀려오는 공허함과 무력감을 이겨낼 수 있는 자신만의 루틴과 소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작은 텃밭을 가꾸는 일도 좋고, 평생 배우고 싶었던 악기를 시작하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고 삶의 주도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르신의 “녹슨 철”이라는 표현은 결코 퇴직자들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직장이라는 온실 속에서 안주하며 다가올 변화를 준비하지 못하는 후배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애정 어린 경고일 것이다. 빛나는 다이아몬드의 시기일수록, 그 빛이 조직의 후광 때문인지 아니면 나 스스로 발하는 빛인지를 냉철하게 돌아봐야 한다.
오늘, 당신의 책상 위에 놓인 명함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 명함에서 직장의 이름과 직위를 지웠을 때, 과연 무엇이 남는가? 그 남은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갈고닦는 노력이야말로, 우리를 퇴직 후에도 녹슬지 않는, 여전히 빛나는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