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아카이브_ 동해
한때 집안 구석마다 굴러다니던 LP판은 이제 수집가의 전유물이 되거나, 버리기 애매한 추억의 짐이 되곤 한다. 바늘은 부러지고, 소리는 잡음으로 가득 차며, 더 이상 음악을 담지 못하는 낡은 원판. 그러나 동해 월산 아트만 김형권 화백 작업실에서는 이 LP가 전혀 다른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김 화백은 오래된 음반에 붓을 대어 풍경을 피워 올린다. 소리를 담던 검은 음반 위로 소나무가 자라나고, 바람이 스며들며, 노래 대신 색채의 울림이 번져나간다. 음악의 시간은 그림의 공간으로 변주되고, 낡은 매체는 예술의 캔버스로 다시 태어난다.
이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재활용이 아니라 ‘추억의 재발견’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살아낸 기록이자 일상의 흔적이던 LP가, 화가의 손끝에서 예술로 승화된다. 소멸과 창조가 맞닿는 지점, 그곳에서 우리는 시간의 깊이를 다시 읽는다.
사실 이 장면은 LP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낡은 냉장고, 장롱, 카세트테이프, 빛바랜 사진첩, 심지어는 집안 오래된 의자 한 점도 누군가의 시선과 손길을 만나면 문화가 된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흔적들이야말로 새로운 예술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김 화백의 작품은 증명한다.
예술은 결국 ‘다시 보기’의 힘이다. 사라진다고 믿었던 것들이 되살아나고, 버려진다고 여겼던 것들이 새로운 가치를 얻는다. 낡은 LP가 화가의 손끝에서 문화가 되었듯,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서도 예술은 늘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춘천에서 대한민국 힐링미술대전 작품 접수로 방문한 강원문화연구소 허준구 소장과 레아박 박가 가족과 함께 방문한 월산 아트만 관장님의 작업실, 82년부터 외길 DJ의 길을 걸어온 나로서는 더욱더 시선이 깊어지는 그림이자 시간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문화적 상상력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