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만학일기

논문은 늘 ‘서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92. 만학일기

by 조연섭

나의 이번 논문도 그랬다. 문제의식으로 출발했으되, 길은 연구방법에서 열렸다. 인터뷰를 통해 축적된 목소리들, 그 목소리를 붙잡고 근거이론의 개방코딩–축코딩–선택코딩을 거치며 비로소 논문의 골격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도교수의 “이제 보인다”는 한마디는, 통과의례처럼 조용했지만 분명한 승인 신호였다.


연구방법을 먼저 완주하자 논문은 사람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핵심이 보였으며 더 이상 추상적인 기획서가 아니었다. 개방코딩에서 흩어진 언어들이 드러났고, 축코딩에서 그 언어들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선택코딩에 이르러서는 사회현상이 하나의 핵심 범주가 중심을 잡았다. 이 과정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에 가까웠다. 연구자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다시 이론적 배경으로 돌아간다. 이론은 장식이 아니라 해석의 언어다. 이미 현장에서 도출된 개념들이 있기 때문에, 이론은 이제 현장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장이 이론을 호출한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기록의 민주화, 공공성 담론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터뷰 속 문장들과 접속하며 살아 움직이게 된다.


서론은 그다음이다. 서론은 선언이 아니라 회고적 결단이기 때문이다. 왜 이 연구를 하는가라는 질문은, 방법을 통과한 이후에야 비로소 정확한 문장으로 응답할 수 있다. 연구방법을 거친 서론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계획이 아니라 결과의 요약이기 때문이다.


이번 논문을 쓰며 다시 확인한다.

논문이 보인다는 것은, 글이 쉬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이 더 분명해졌다는 의미다.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은 말하지 않기로 했는지가 명확해졌다는 뜻이다. 그 경계가 서면, 논문은 비로소 연구자의 얼굴을 닮는다.


논문은 마라톤이 아니라 지형 답사에 가깝다. 지도를 그리기 전에 먼저 걸어야 한다. 나는 이제 걸어본 사람으로서, 다시 서론을 쓴다.

이번에는 길을 아는 사람의 문장으로…

논문쓰는 사람, 프롬프트_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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