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만학일기
벼랑 끝에서 다시 외치는 동생의 주문, "와우!" 남을 살리면, 나도 산다!
익숙한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다. 청중 앞, 떨릴 법도 한데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무대 위 주인공. 바로 내 고종사촌 동생, 경희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각자의 삶이 치열해 깊은 속내까지는 다 헤아리지 못하고 살았다. 더구나 요즘 나는 내 코가 석 자였다. 21년 일해온 직장에서 갑자기 해당 없는 '정년'이라는 기계적인 잣대와 임금 삭감과 집행 보류를 마주하며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 가치가 숫자 몇 개로 재단되는 것 같은 모멸감, 억울함, 허탈함... 마음이 지옥 같던 시기에 26일 저녁 동생이 보내온 “세바시” 강의는, 뜻밖에도 나에게 가장 큰 위로이자 죽비소리가 되었다.
"저는 20년 넘게 사람들의 아픔을 돌봐온 간호사입니다. 그런데 5년 전, 뇌종양 진단을 받았습니다."
덤덤하게 뱉어낸 동생의 첫 문장이 어지러웠던 내 마음을 단숨에 정지시켰다. 나는 고작 직장 내 갈등으로 '끝'을 고민하고 있는데, 동생은 진짜 생의 '끝'인 죽음 앞에 서 보았구나. 암 전문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다 스스로 환자가 되어버린 기막힌 운명 앞에서, 그녀가 느꼈을 절망의 깊이는 감히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영상 속 자랑스러운 동생 경희는 그 절망의 바닥에서 웅크리고 있지 않았다. 임종을 앞둔 소녀를 위해 눈물을 삼키며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가 소녀를 편안하게 보내주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죽어가던 경희의 영혼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을 살리면, 나도 산다."
동생이 강의 내내 강조한 이 말은 처절한 고통 속에서 온몸으로 체득한 생존의 진리였다. 병실 문을 열 때마다 "와우!"를 외치며 환자들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불어넣고, 말기 암 환자와 춤을 추며 마지막 순간에 웃음을 선물했던 그녀. 놀랍게도 그 이타심은 기적이 되어 돌아왔고, 거짓말처럼 뇌종양이 사라지는 치유를 경험했다.
화면을 보며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 억울하다', '나 힘들다'며 내 상처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 동생은 그 아픈 몸으로 타인을 살리며 자신을 구원하고 있었다.
인생은 얄궂게도 그녀에게 화재, 수술, 교통사고라는 '고난 3종 세트'를 다시 안겨주었지만, 그녀는 또다시 일어섰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인가" 자책할 때, 그녀가 돌보던 환자가 건넨 "선생님은 너무 귀한 분이세요. 꼭 행복하게 살아주세요"라는 한마디를 붙잡고서 말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지금 모습 이대로 충분해요. 살아갈 가치가 있어요."
동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한 이 메시지는, 마치 지금 개인 문제로 흔들리는 나를 위해 준비된 말 같았다. 실적보다 갑이 정한 규정한 상황이 다가온다 해서, 내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다. 제도적 한계가 나의 본질적 가치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동생 경희가 뇌종양이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도 '와우 간호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꽃피웠듯, 나 또한 지금의 시련을 넘어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자랑스러운 동생 경희야?
우리 동생은 환자들의 몸만 치료한 게 아니라,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이 못난 오빠의 마음까지 고쳐주었구나. 네 말대로, 우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고 귀하다는 것을 다시금 새긴다.
네가 보여준 그 용기를 이어받아, 나 역시 지금의 이 시련을 당당하게 마주해보려 한다. 너의 그 힘찬 "와우!" 소리가 내 삶에도, 그리고 고단한 삶을 버티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가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동생 경희야 고맙다. 이렇게 멋지게 살아내 줘서. 또한 힘든 오빠에게 “좌절과 불평도 욕심”임을 삶으로 보여줬고 다시 일어설 힘을 줘서. 동생 강의를 통해 다시 한번 다짐한다.
“남을 죽이면 나도 죽는다. 그러나, 남을 살리면 나도 산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세바시) 강의 장면 캡처_ 조연섭
문경희 세바시 라이브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