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지역N문화
묵호의 핫플로 불리는 여행책방 '잔잔하게'를 방문했다. 주인장 조성중, 채지형 작가부부를 만나기 위해서다. 채 작가는 출장 중이었고 조작가가 반갑게 맞이했다. 오전 10시전후인데 벌써 독립여행에 오른 여행자들이 북적인다. 작가와 대화할 시간은 부족해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책방에 사람이 넘치는 모습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처음 작가부부가 묵호를 선택할 때부터 가까이 했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주인장 앞 책꽂이에 놓인 짧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적자생존,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우리는 오랫동안 ‘적자생존’을 자연 법칙처럼 외워왔다. 강한 자, 빠른 자, 많이 가진 자가 살아남는다는 명제. 이 문장은 그 익숙한 문장을 살짝 비틀어, 오늘의 삶을 향해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과연 지금의 시대에도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가. 아니면, 적는 자가 살아남는가.
기록은 힘이 세지 않다. 기록은 조용하다. 그러나 기록은 오래간다. 말은 흩어지고, 기억은 바래지만, 적힌 문장은 남는다. 남는다는 것은 곧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지역의 역사에서도, 문화의 시간에서도 그렇다.
묵호라는 도시는 오랫동안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로 가득한 곳이다. 항구의 노동, 새벽의 출항, 골목의 저녁, 사라진 상호와 남아 있는 사람들. 누군가는 살았고, 누군가는 떠났지만, 적지 않으면 그 삶은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그래서 독립서점은 책을 파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지역이 스스로를 기록하는 작은 아카이브가 된다.
‘잔잔하게’라는 이름처럼, 이 서점은 요란하지 않다. 대신 종이와 펜, 대부분 책에 메모가 담겨있다. 문장과 여백이 말을 건다. “지금 당신의 삶은 기록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개인에게도, 공동체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기록하지 않는 문화는 축적되지 않고, 축적되지 않은 문화는 정책이 되지 못하며, 정책이 되지 못한 문화는 다시 사라진다.
시대정신이 담겨서 인지 요즘 잘 팔린다는 책이 추가로 도착했다. 작가(삼척고등학교 교사)가 직접 책을 들고 온것이다. 독립책방 분위기로는 흔치 않은 모습으로 오전부터 분주하다. 요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비한다. 영상은 넘쳐나고, 소식은 빠르다. 그러나 빠른 것은 오래 남지 않는다. 결국 남는 것은, 천천히 적힌 문장이다. 하루의 생각, 현장의 메모, 사람의 이름, 장소의 온기. 그것들이 모여 한 사회의 깊이가 된다.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말은, 기록하는 개인만이 아니라 기록하는 지역, 기록하는 문화만이 다음 세대로 건너갈 수 있다는 선언에 가깝다.
묵호의 여행책방 "잔잔하게"에서 만난 이 짧은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다.
오늘도 누군가는 경쟁에서 밀려난다. 나일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조용히 적는다. 역시 나일수도 있다.
그리고 역사는, 언제나 후자의 편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