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노트_ 동쪽여행
위기는 사람을 드러낸다. 예상치 못한 개인 신상 문제로 몇 달을 힘들게 보내며, 30년 문화 현장에서 배우지 못한 능력의 본질을 배웠다.
선배들은 “사필귀정”이라 했고, 동료들은 묵묵히 커피 쿠폰을 끊었다. 단골 식당 주인은 밥을 차려주었고, 직장 환경미화원은 브런치 계정에 후원을 보냈다. 이들은 내 학력을 모른다. 내가 쓰는 논문도, 기획한 프로젝트 성과도 모른다. 그저 함께 해온 시간 속에서 쌓인 무언가를 믿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능력 증명에 익숙하다. 학교, 학위, 경력, 수상 내역, 프로젝트 실적. 문화예술계는 특히 그렇다. 공모 사업 신청서마다 ‘역량’과 ‘전문성’을 증빙하라 요구한다. 정작 위기가 왔을 때 나를 지탱한 것은 그 서류철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맨발로 해변을 걷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묵호 논골담길 골목길 프로젝트를 함께 걸어온 주민들, 지난 21년간 3만여 명의 문화학교 수강생들과 나눈 일상의 대화들이었다.
신뢰는 실적표에 기입되지 않는다. 그것은 반복된 행동 속에서 축적되고, 일관된 태도에서 확인되며, 작은 약속들의 이행으로 증명된다. 단골집 커피숍에 커피 쿠폰을 끊어 전달해 준 동지의 응원, DJ추억을 소환하라고 LP음반에 두타산 소나무를 그려 응원한 월산 아트만 김형권 관장님 등 모두의 응원은 나의 기획력 때문이 아니다.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앉아 지역 문화 이야기를 나누고 실행한 그 지속성 때문이다.
지역문화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관계의 두께’다. 화려한 이력서를 가진 외부 전문가보다, 10년 동네를 지킨 활동가의 한마디가 주민을 움직인다. 탁월한 기획안보다, 수십 번 함께 밥 먹고 술 마신 기억이 협업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내가 ‘지역문화아카이브 공공영역 재구성’이라는 논문 주제를 붙잡고 있는 이유다. 진짜 지역문화는 ‘신뢰의 아카이브’ 위에 세워진다.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간다. 그런데 ‘바른 길’이란 무엇인가. 이번 경험이 가르쳐준 것은, 그것이 정의의 심판이 아니라 관계의 복원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쌓아온 신뢰가 결국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라는, 공동체의 기억이 개인의 일시적 위기를 넘어설 것이라는 믿음.
직장의 환경미화원의 브런치 후원 알림을 받으며 울컥했다. 그는 내 브런치 글을 읽는다. 맨발 걷기 기록을, 지역문화에 대한 단상을, 일상의 고민들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냥 읽는다. 그는 글을 보고 현금 후원으로 응원했다. 이것이 능력이 아니면 무엇인가.
30년 문화 현장을 버틴 힘은 탁월함이 아니었다. 꾸준함이었고, 진정성이었으며, 약속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것이 쌓여 신뢰가 되었고, 신뢰가 위기의 순간 실력을 넘어서는 능력이 되었다.
이제 나는 안다. 이력서에 쓸 수 없는 능력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능력 이름은 ‘신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