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습니다. 건배로 정든 ‘문화원’을 떠납니다.

226. 노트_ 동쪽여행

by 조연섭

한 자리에서 스물한 해를 보냈다. 긴 시간이라고 말하기에는 하루하루가 숨 가빴고, 짧았다고 하기에는 내 기억 속에 남은 얼굴과 이름들이 너무도 많다.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동해문화원이라는 공간에서 계절이 바뀌고 사람이 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정든 책상을 정리하며, 지난 시간을 복기해 본다. 떠나는 이 순간, 내게 남은 것은 화려한 성과표가 아니라 그 시간을 함께 견디고 채워준 사람들의 결이다.


문화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자리를 '내어주는 일'


선배님 추천에 동의하고 2004년 7월 공개채용으로 시작된 지역문화원과 보낸 시간은 내게 '문화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과정이었다. 문서를 작성하고 행사를 기획하는 것이 주된 업무처럼 보였지만, 본질은 달랐다. 그것은 관계를 설계하고, 얽히고설킨 시간들을 조율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배웠다. 문화란 결국 물리적인 무언가를 화려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머무를 수 있는 따뜻한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존경하는 역대 원장님들, 웃고 울며 같은 사무실에서 숨을 맞추며 일해 온 동료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문화원을 지탱해 준 수많은 관계자들. 그분들의 신뢰와 인내가 없었다면 문화원은 그저 딱딱한 행정의 껍질만 남은 기관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문화원이 '사람의 얼굴을 가진 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분들의 온기 덕분이다.


문화는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 가장 오래 기억될 ‘논골담길’을 비롯한 숱한 현장은 나에게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그곳에서 나는 문화의 진짜 본질을 다시 배웠다. 그것은 가파른 골목을 걷는 속도에 있었고, 주민들과 눈을 맞추는 투박한 방식에 있었다.


축제의 화려한 무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준비 과정에서 흐르던 긴 침묵과 땀방울이었다. 문화는 언제나 화려한 중심이 아니라, 소외된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현장은 내게 수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물론 지금까지 걸어온 그 길은 늘 순탄치만은 않았다. 문화는 늘 가시적인 결과를 요구받지만, 그 과정은 숫자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 탓이다. 때로는 억울한 오해를 견뎌야 했고, 때로는 구구절절한 변명 대신 침묵이 가장 정확한 선택일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문화원에서의 21년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묻는 시간이 아니라, '어떤 태도로 버텼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수행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문화적 태도' 이제 나는 익숙한 이 자리를 떠난다. 나는 '떠남'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그것은 그냥 등을 돌리고 나가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머물던 자리를 잘 정돈해 남겨두는 일이라고 믿는다.


말보다는 태도로, 구차한 해명보다는 깊은 감사로, 희미한 기억보다는 단단한 신뢰로 남고 싶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문화원 기간 모든 이에게 전하는 ‘문화의 마지막 예의‘다.


문화원에서 배운 가장 큰 가치는 굳이 화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저 끊기지 않고 지속되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사람을 소모품으로 대하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존중하며, 지역 고유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 단순한 원칙이 지켜질 때 문화는 비로소 우리의 삶이 된다.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역사는 권력보다 정의의 편이라며 응원해 준 가족과 선배님들, 특히 “근로자의 인권을 위해 형님의 선택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라며 어려운 응원과 행동으로 나를 지켜준 김창래 행정학 박사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이제 그동안 담지 못한 창의적이고 평화로운 다른 길, 생애전환의 길을 걷게 되지만, 문화원에서 배운 그 '태도'만은 끝까지 품고 갈 것이다. 우리가 맺은 이 인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오래도록 아름답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 사진_ 조연섭 DB
논골담길 해외 송출 장면_ 아리랑TV
김명화 작가 작품 ‘논골담길‘ 인사동 전시장에서

2026. 2.2(월)

전, 동해문화원 사무국장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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