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노트_ 맨발걷기
이틀 사이 계절의 채도가 바뀌었다. 날 선 바람은 부드럽게 풀렸고, 해는 한층 포근해졌다. 762일 매일 아침 맨발로 걷고 있는 동해시 추암 해변. 이곳의 공기는 분명 봄이다.
그러나 발바닥에서 감지되는 신호는 계절의 온기와 어긋난다. 따뜻한 봄볕 아래, 해안선은 비명 없이 깎여 나가고 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가파른 모래 절벽(침식면)이 곳곳에서 흉터처럼 드러났다. 봄의 화사한 얼굴 뒤편에서, 해변은 조용하고도 급격하게 뒷걸음질 치고 있다.
추암은 예로부터 '미인의 눈썹을 닮은 해변과 능파대의 절경을 자랑해 왔다. 기암괴석의 곡선과 윤슬의 결이 어우러진 풍경의 중심에는 그 유명한 촛대바위가 서 있다. 하지만 오늘 추암은 깊은 우려를 불러온다.
날씨는 풀렸지만, 해안 침식의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겨울 몰아친 너울성 파도의 잔흔과 인공 구조물의 영향이 겹치며, 모래의 자연스러운 순환이 끊긴 흔적이 선명하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모래사장 대신 깎아지른 흙더미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물론 다시 돌아올 해변으로 믿을수 밖에 없지만 바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파랑의 방향 변화, 잦아진 기상이변, 그리고 연안선을 고정하려는 인공 구조물들. 이 삼중의 조건이 합작하여 모래를 빼앗고 절벽을 노출시키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관리와 설계가 빚어낸 결과다.
단기적인 모래 채움이나 임시방편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모래의 이동 흐름 자체를 회복하는 연안 설계, 기존 구조물에 대한 단계적 재검토, 그리고 계절과 파랑의 변화를 읽어내는 장기적인 모니터링이 시급하다.
침식은 보행 동선이 좁아지고 모래 언덕의 붕괴 위험이 커지면, 해변은 추억을 쌓는 장소에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장소로 변질된다. 안전은 곧 지역 주민의 일상이며, 일상이 무너진 곳에 관광의 미래는 없다.
관광의 상징을 지키는 일은 소비를 늘리는 단기부양책이 아니라, 보존을 설계하는 백년대계여야 한다. 자연을 콘크리트로 고정하는 대신, 물길과 모래의 흐름을 복원하는 선택. 그 어려운 선택이 다음 세대가 누릴 해변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다.
맨발은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기계보다 예민한 기록 장치다. 762일 동안 발바닥으로 읽어낸 오늘의 추암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봄은 왔지만, 해변은 아직 겨울 속에 갇혀 있다고.
'미인의 눈썹'이 다시 그 유려한 곡선을 되찾으려면, 지금 우리의 걱정이 구체적인 정책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우리가 추암을 사랑하는 이유가 단지 사진 한 장의 배경이어서는 안 된다. 이곳이 지속 가능한 풍경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금은 걷는 것만큼이나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