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어? 오늘도 걷네

176. 노트_ 맨발걷기

by 조연섭

내가 지은 제목, 인생이 바뀌는 시간 774일째 추암해변이다.

해변의 모래는 아직 겨울의 결을 조금 품고 있었지만, 공기는 이미 봄의 숨결을 띠고 있었다. 발바닥에 닿는 촉감이 달라졌다. 차갑기만 하던 모래가 이제는 “괜찮다”는 듯 천천히 체온을 받아들인다. 바다는 묵묵히 파도를 밀어 올리고, 나는 그 위에 나의 하루를 얹는다.


해변 상가의 셔터가 올라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왔어? 오늘도 걷네.”


아침마다 만나는 매점 할머니의 밝은 인사다. 그 목소리는 바다보다 먼저 나를 알아본다. 아침 인사는 늘 짧지만, 그 안에는 계절의 안부와 사람의 온기가 함께 담겨 있다. 장사를 시작하는 손길과 하루를 시작하는 발걸음이 한 시간대에 포개진다. 이 작은 교차가, 어쩌면 지역을 지탱하는 가장 조용한 힘인지도 모른다.


몇 명 되지 않는 맨발러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해변을 맨발로 걷는다. 말은 많지 않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살짝 흔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서로의 발을 본다. 신발을 벗었다는 사실이 이미 한 편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속도를 내려놓고, 땅과 직접 닿겠다는 다짐.


모래와 해변은 늘 그렇지만 정직하다.

어제의 발자국은 사라졌고, 오늘의 발자국은 또다시 새겨진다. 기록은 남지 않지만, 감각은 쌓인다. 나는 770일이 넘는 시간을 걸으며 깨달았다. 맨발 걷기는 운동이 아니라 '관계'라는 것을. 땅과의 관계, 바다와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과의 관계.


봄을 맞아 나는 조심스레 권하고 싶다.

올해는 한 번쯤, 해변 맨발 걷기에 도전해 보시라고.


거창한 준비는 필요 없다.

아침 한 시간을 비워두면 된다. 휴대전화를 잠시 주머니에 넣고, 신발을 갯바위에 벗어놓고, 모래 해변 위에 첫 발을 올려보면 된다. 처음에는 차갑고, 조금은 어색하다. 그러나 몇 분 지나면 전자파와 활성산소가 중화되고 마음까지 이내 풀린다. 발바닥이 땅을 읽고, 귀는 파도의 간격을 듣고, 눈은 수평선의 넓이를 배운다.


나는 동해에 '동햇사람'으로 산다. 동햇사람은 동해 사람은 아니지만 동해에 사는 사람으로 부른다고 했다.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시에서, 바다는 매일 새로운 페이지를 연다. 그 첫 장을 맨발로 넘기는 일은 사치가 아니라 선택이다. 도시가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모래와 파도는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 위를 걷는 사람도 서서히 달라진다.


오늘도 774번째 기록을 남긴다.

숫자는 늘어나지만, 감각은 더 단순해진다.

아침이 나를 반겨주는 풍경 속에서, 나는 다시 배운다.

행복은 멀리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발밑에서, 조용히 올라온다는 것을.


올봄, 바다가 당신을 먼저 부르기 전에

당신이 먼저 신발을 벗어보길.


그 한 걸음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꿀지 모른다.

추암 할머니 가게, 사진_ 조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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