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지나가고, 인간은 남는다!

174. 노트_ 맨발걷기

by 조연섭

아무도 밟지 않은 모래 위에 첫 발을 올려놓는 아침이 있다. 흔적이 없다는 것은, 아직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늘 아침, 나는 그 빈 문장 같은 해변에 맨발로 서 있었다.


요즘 문득 한강 작가의 문장이 떠오른다.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상태에 불과하며, 그 시간을 통과한 인간은 이전보다 더 인간다워진다. “라는 말.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라는 조용한 권유. 그의 문장은 위로라기보다 깨달음에 가깝다. 고통을 제거하자는 선언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는 태도에 대한 제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고통을 실패나 결핍으로 오해한다. 견뎌야 할 불행, 빨리 끝내야 할 시간으로만 취급한다. 그러나 문학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고통은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드러낸다. 감각을 열고, 삶의 밀도를 높이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만든다. 한강의 문장은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춰 서 있다. 고통 이후의 세계를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이 조금 더 깊어질 뿐이라고 말한다.


아무 흔적 없는 아침의 맨발 걷기는 그래서 더 상징적이다. 어제의 발자국도, 어제의 설명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지금의 몸과 지금의 생각만이 모래 위에 놓인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보호를 내려놓는 행위다. 속도를 늦추고, 감각을 불러오는 선택이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차가움과 습기, 미세한 통증은 삶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다가온다.


혼자 걷는 시간은 고독과 닮았지만, 고립과는 다르다. 고독은 자신과 대면하는 공간이고, 고립은 세계와 단절된 상태다. 한강이 말한 ‘혼자만의 시간’은 바로 이 고독의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연약한 존재로, 동시에 회복 가능한 존재로 인식한다. 고통을 견뎌낸 자가 타인 삶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 아침, 해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감각을 내주었다. 고통이 잠시 머물다 가는 것처럼, 이 아침도 곧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발로 밟은 차가운 모래의 기억은 하루의 태도를 바꿔놓는다. 조금 느리게, 조금 낮게, 조금 더 인간 쪽으로.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통과한다. 그리고 그 통과의 흔적은, 문학처럼, 맨발처럼, 인간을 더 깊고 조용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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