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골담길 커먼즈
폭설주의보가 내린 16일 아침, 눈비가 유리창을 두드리던 시간, 논골담길 커먼즈의 간판은 묵묵히 첫 계절을 맞고 있었다.
아침 9시 도착하자마자 새 사무실 ‘논골담길 커먼즈‘ 앞 도로 모든 주차장은 이미 만차. 여행자들의 발걸음은 계절을 묻지 않는다.
나는 어제 방문한 삼척 중앙시장 장군 문어 기사를 마무리하며 하루를 열었다. 설 차례상에 오르는 문어의 의미를 묻는 기사였다. 제례의 음식, 바다의 생명, 공동체의 기억. 기록은 늘 현재를 붙잡아 두는 방식이다.
그리고 곧, 이 공간의 첫 프로그램 기획 파일을 열고 마음을 옮겼다.
87세, 명문여대 출신의 한 할머니.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늦게 시작했지만 늦지 않았다.
나는 이 전시를 준비하며 자연스레 떠올린 이름이 있었다.
그랜마 모지스.
농부의 삶을 살다 일흔이 넘어 붓을 잡았던 그 여성처럼, 우리의 할머니 역시 시간을 건너 창작의 자리로 들어왔다.
화려함 대신, 용기
이번 전시는 장식하지 않기로 했다.
액자를 최소화하고, 조명을 낮추고, 공간의 여백을 남긴다.
입구에는 ‘작가 소개’와 삶의 서문을 둔다.
1930년대의 기억, 전쟁과 가정, 자녀와 손주를 거쳐 여든일곱에 다시 시작한 이야기.
관람객이 작품을 보기 전에 삶을 먼저 읽도록.
글의 방 — 문장은 늙지 않는다
한지 위에 적힌 시 한 편.
연필로 쓴 초고의 흔적.
떨림이 있는 글씨는 오히려 단단하다.
나는 이 공간에 의자를 하나만 둘 생각이다.
앉아서 읽는 사람은 스스로 질문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미루고 있는가.”
문장은 나이를 묻지 않는다.
다만, 용기를 묻는다.
그림의 방 — 색은 삶의 잔향이다
40여 점의 그림은 벽에 직접 숨 쉬듯 배치한다.
논골담길 수묵화와 나란히 마주 놓일 때 이 전시는 지역의 시간과 연결된다.
그림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건너온 감각의 문제라는 것을 할머니의 붓은 증명한다.
아카이브존 — 기록은 다시 시작을 부른다
전시의 마지막 존에는 작은 질문을 남긴다.
“당신의 87세는 무엇을 시작할 것인가.”
방문객이 짧은 문장을 남길 수 있는 기록 공간을 둔다.
논골담길 커먼즈가 지향하는 ‘24시 문화순환’은 관람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록은 또 다른 시작을 부른다.
폭설이 지나간 오후, 나는 김명화 미술철학박사가 어렵게 보내온 수묵화 ‘논골담길’ 파일을 다시 펼쳤다. 지난 1월 서울 인사아트플라자에서 성공적으로 전시된 작품이다. 길이 10m의 초대형 작품으로 논골담길 낮과 밤을 표현한 작가의 미술세계가 돋보이는 대작이다. 이 작품은 사무실 정면에 명함을 대신해 걸어놓을 예정이다.
새해 인사말 디자인으로 일과를 마치며 내용은 공간의 정신 새해 인사를 적었다.
이곳 모두의 공론장 ‘논골담길 커먼즈’는 도시의 시간을 연결하는 공론장이다. 사람의 삶을 다시 이야기로 불러내는 자리다.
할머니의 첫 전시는 이 공간이 앞으로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 보여주는 선언이다.
늦게 핀 꽃은 오래 머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