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지역N문화
20일 저녁, 동해 묵호의 여행책방 ‘잔잔하게‘에서 열린 금황지 시인 북토크에 참석했다.
행사장은 유목여행자로 알려진 박동식 작가와 제주에서 다시 동해로 돌아온 해군 현역 이재훈 가족, 서울 청담중학교 국어 교사, 여행책방 잔잔하게 채지형, 조성중 작가부부 등 20여명이 참석했다.
여행작가 채지형 진행으로 열린 북토크는 한 문장이 씨앗이 되어 자란 한 소년의 시간이 있었다.
“책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이 한마디가 중학생 이예준의 삶을 바꾸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사서로 아이들을 만나던 스승, 시인 금황지의 제자였다. 아이들에게 책 읽는 법을 설명하던 그 말은 교훈이 아니라 태도였다. 활자를 눈으로 훑는 행위가 아니라, 문장 속으로 들어가 자기 삶을 비추는 일. 예준은 그때 처음으로 ‘읽기’를 시작했다.
북토크 자리에서 이예준 군의 어머니 고영미(43세)와 아버지 이재훈(45, 해군)씨는 말했다.
“우리 예준이가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작가를 꿈꾸게 됐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독자가 되고, 독자가 다시 창작의 길을 꿈꾸기까지. 그 변화의 출발점이 도서관의 조용한 오후였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에 더없이 소중하다. 독서는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세우는 과정이라는 것을, 어제 우리는 한 학생을 통해 다시 확인했다.
이름을 시로 불러주는 일
이날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순간은, 금황지 시인이 나의 이름을 시로 불러주던 시간이었다.
“조연섭: 국장님은 조(좋)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연결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국장님은 섭외 1 순위인 사람입니다. “
문학기획자로 살아온 나의 시간, 북평장터의 별빛과 달빛 아래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손뜨개질을 하던 장면, 골목을 문화의 길로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기획했던 2010년의 논골담길, 그리고 묵호의 묵호등대를 바라보며 쌓아온 시간들.
그 모든 것이 작가의 시집 문장 안에 녹아 있었다.
행사는 사라지고, 현수막은 걷히고, 무대는 철수되지만 시로 남은 기억은 오래 숨을 쉰다.
북평장터의 포차에서 나누던 웃음도, 밤바다의 등대 불빛도, 한때는 기획안의 문장이었을 논골담길의 청사진도, 이제는 한 권의 시집 속에서 또 다른 생명을 얻었다.
문학은 결국, 누군가의 삶을 기록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제자와 스승, 그리고 지역의 시간
금황지 시인의 시집에는 거창한 수사가 없다. 대신 지역의 숨결과 사람의 결이 있다. 북평장터, 묵호, 묵호등대. 도시의 변두리라 불리던 공간들이 그의 언어 속에서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안에, 한 문화기획자의 삶이 조용히 포개진다.
나는 행사 기획을 통해 공간을 연결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어제는 알았다.
문학은 사람을 연결한다는 것을.
이예준 학생의 성장담은 개인의 성공 서사가 아니다.
한 명의 사서가, 한 명의 시인이, 한 지역의 문화 현장이 만들어낸 공공의 이야기다. 아이 한 명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지역의 미래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언제나 누군가의 말 한마디다.
“책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삶이 작품에 스며드는 순간
시집을 넘기며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기획자로서 분주히 달려온 시간들이 타인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
요즘 나 홀로 여행의 성지로 불리는 묵호 논골담길을 처음 설계하던 2010년의 여름, 골목의 벽면에 어떤 삶의 이야기를 입힐지 고민하던 밤들, 묵호등대 아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지역의 미래를 상상하던 순간들. 그것은 사업 보고서가 아니라, 이제 시가 되었다.
기획은 사라질 수 있지만, 시는 남는다.
그것이 어제 북토크가 남긴 가장 깊은 가치다.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이예준 학생은 이제 중학생이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이미 문장이 자라고 있었다. 그는 스승의 어록을 기억했고, 그 문장을 자신의 언어로 옮기고 있었다.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우리는 어제 목격했다.
어쩌면 문학기획자로 살아온 나 역시, 또 다른 방식의 ‘읽는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도시를 읽고, 사람을 읽고, 골목을 읽어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읽힘이 누군가의 시 속에서 다시 쓰인다.
문학은 거대한 담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도서관의 오후, 장터의 불빛, 등대의 바람, 그리고 한 아이의 귀에 꽂힌 한 문장에서 시작된다.
어제의 북토크, 그것은 한 제자의 성장 기록이었고, 한 기획자의 시간이 시가 된 순간이었으며, 동해라는 도시가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읽는다는 것은, 결국 살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낸 시간은, 누군가의 시가 된다.